나도 박물관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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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박물관을 즐기고 싶다
  • 안승준 / 시각장애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05 09:26
  • 수정 2020-06-0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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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의 조각상들을 손으로 만졌던 이야기를 칼럼으로 적었던 적이 있다.

‘밀러의 비너스’를 손으로 감상하고 싶었던 청년과 그를 총으로 겨누면서 제지하던 보안요원의 대치는 상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보안요원의 파격적인 결정으로 박물관의 모든 전시물을 손으로 느끼게 되는 한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로 반전의 결론을 담게 된다.

글쓴이인 나 스스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소수의 불편한 이들이 가져야 하는 권리의 범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긍정적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수천 년 된 유물의 보존을 걱정하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수천수만 개의 악플을 적게 하는 분노의 상황이 되기도 했다.

쉽게 결론 나지 않은 오랜 논쟁 덕분에 난 이슈의 중심에 선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유명 포털의 메인 페이지와 유명 칼럼니스트들의 글감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빗발치게 쏟아지던 방송 섭외와 출판 제의들을 생각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이 유물을 손으로 감상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쪽으로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분명했다.

10년도 훨씬 넘은 어느 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방문했다.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여전히 시각장애인에게 박물관은 그다지 끌리지 않은 장소였지만 그 때문에 외국의 전시물들은 오히려 호기심 자극하는 매력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비너스를 느끼다’라고 이름 지었던 칼럼의 속편급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상상도 잠시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각각의 보안요원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시각장애인의 접근이 허용되었던 대형박물관의 상황과 달리 그곳에는 ‘터치 투어’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전에 접수만 하면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가며 파라호 조각을 비롯한 40여 점의 전시물들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시각장애인으로 미리 신청하지 않은 다른 일반의 관람객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만진 모든 작품들은 실물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은 거짓보다는 진실에 가까워 보였다. 모든 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은 한 편의 아쉬움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어쩌면 유물의 보존과 시각장애인의 접근성이라는 좁혀지지 않은 논쟁 사이에서 세워진 나름의 타협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일 년 중 대부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추면 그 또한 눈물 나도록 부러운 제도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뉴욕 이야기들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긍정의 다름으로써 작용할 때가 많다. 시각장애인이 파일럿이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고, 모든 버스기사가 장애인 리프트에 대해 철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쉽게 따라 하기 힘든 내용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큰 틀의 동의는 끌어낸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의 ‘터치 투어’는 여전히 쉬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논쟁이 되고는 한다. 우리의 의무교육이 조상의 유물에 대한 보존과 후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가치에 대해 꽤나 강력한 사상을 심어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각장애인의 감상권보다는 그 상황에서 벌어질 작품의 훼손에 대해 걱정하는 의견들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나도 같은 나라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생각들에 전혀 동의 못 하는 바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시각장애인의 접근성 보장 쪽으로 조금 더 치우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후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훌륭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천년만년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냥 최대한 많은 인류가 감상할 수 있게 하자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다수인 비장애 후손을 위해 소수인 현생 시각장애 인류가 희생하라는 이야기밖에는 안 된다. 다수를 위한 소소의 양보는 일상적으로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슬픈 스토리 아닌가?

혹자는 정교하게 설계된 가품을 감상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일반의 사람들이 진품에 열광하고 그것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크게 배신감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품과 정교한 모조품이 아무런 차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시각장애인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가짜를 보는 쪽이 더 많은 후손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는가?

반대로 현재 인류가 진품 먼저 보고 후손에게는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조품을 물려준들 그것 또한 크게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

난 박물관을 사람들이 찾고 작품 앞에서 실물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는 단지 그것의 정교한 모양을 보려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아니라서 정확히 표현은 못 하겠지만 보통의 사람들도 예술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있는 것, 그것들이 가진 숨결이나 실제의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으로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은 손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면 각자의 방법 모두 허용되어야 한다. 나 또한 선대의 조상들이 유물을 물려주고 싶어 했던 후손이기도 하고, 오래된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인간이기도 하다.

보존이라는 가치도 순고하지만 그 가치를 위해 소수의 약자 집단을 배제하는 모양새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타협점은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손으로 만질 수밖에 없는 친구가 있다면 당연히 그를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훼손이 염려된다면 손으로 만지더라도 덜 위험한 보존방법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더 좋지 아니한가? 다수의 결정은 때로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소수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익숙한 양보를 강요한다. 우리도 후손도 다수도 소수도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아름다운 박물관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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