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경성(有志竟成)’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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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경성(有志竟成)’을 바라며
  • 편집부
  • 승인 2012.01.06 00:00
  • 수정 2013-01-25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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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일/인천광역시시각장애인복지관 사무국장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 오면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지나 온 한해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다. 옛 문헌에 기록된 사자성어를 통해 다사다난했던 한해의 세태를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데, 그 사자성어의 풀이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2011년 신묘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국문학ㆍ한문학ㆍ철학ㆍ역사학ㆍ사회학ㆍ경제학ㆍ공학 등 각 분야 교수 23명에게서 사자성어 30개를 추천받은 뒤 교수신문의 논설ㆍ편집기획위원, 칼럼ㆍ비평 필진 32명이 5개의 사자성어를 추려내서 전국 대학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이메일을 통해 설문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각계각층의 교수들 가운데 응답한 304명 중 36.8%의 지지를 받아 2011년 한국사회를 규정할 수 있는 사자성어에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의 ‘엄이도종(가릴 엄掩, 귀 이耳, 훔칠 도盜, 쇠북 종鐘)’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엄이도종'(掩耳盜鐘)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 승상 여불위가 만든 우화집 ‘여씨춘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 범무자의 후손이 다스리던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백성 중 한 명이 종을 훔쳐 짊어지고 도망가려 했지만 종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그래서 종을 망치로라도 깨서 가져가려고 종을 치니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도둑은 다른 사람이 종소리를 듣고 와서 종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 자신의 귀를 막고 종을 깼다고 한다. 내 귀를 막고 나쁜 일을 하면 남도 듣지 못할 것이라 착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얕은 수로 남을 속이려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엄이도종(掩耳盜鐘)’을 2011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한 교수들은 한결같이 독소조항 논란이 있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관련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해킹, 대통령 측근 및 친인척비리 등 각종 사건과 굵직한 정책의 처리과정에서의 '소통 부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의 부족을 누구보다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들 중 하나가 시각장애인일 것이다. 보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때로는 하나밖에 없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은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지만 우리는 지난해 인적이 드문 늦은 밤 일어난 어느 여성시각장애인의 주안역 추락사고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도 그녀가 앉아 있던 책상을 볼 때 마다 시각장애인 부부에게 발생한 끔찍한 사고를 생각하며 한번 사는 인생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런데 얼마 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한 사고가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인천지하철이다. 부평구청역 플랫폼 4-4 위치에서 시각장애인이 선로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급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부평역 방향의 지하철을 이용하려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선로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추락 당시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았고, 주변 승객들의 재빠른 도움으로 목숨이 위태한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이 사고로 피해자는 갈비뼈에 금이 가고, 허리 꼬리뼈를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배낭안의 카메라가 찌그러질 정도의 충격이 있었지만 아마도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이 에어백 역할을 톡톡히 한 모양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특히 이번 사건의 문제점은 스크린 도어는 고사하고 지하철 문이 열리는 승강장에 점자유도블록조차 설치돼 있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승객들의 출입을 알려주는 마크(▲▼▲)가 바닥에 표시되어 있어서 정안인들이 이용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정작 시각장애인에게 소통수단이 되는 점자유도블록이 없었고 뿐만 아니라 최소한 설치되어야 할 가드레일조차 계단입구를 제외하고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해 주안역 추락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의 피해자도 평소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자주 이용하여 매우 익숙한 길이었고 시각장애인 안내견도 함께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확인하려고 발을 뻗어 더듬는 순간 중심을 잃고 밑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스크린도어만 설치되어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일인데 인천에 있는 국철 1호선 11개 역 가운데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은 단 3개역이다. 나머지 역은 아직 설치계획도 없는 실정이다. 관계자는 스크린도어 설치의 경우 많은 예산이 필요해서 이용객수, 공기질, 사고건수 등을 고려해 전국 역사들 중 우선순위를 결정, 설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인천지하철 1호선도 총 29개 역 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개 역에만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내년까지 6개 역에 추가로 설치될 예정이지만 나머지는 2015년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생명이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지만 정부와 인천시는 오직 예산타령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한 부평구청역은 당초 올해 안으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될 예정이었지만 예산부족을 이유로 설치가 내년으로 미뤄졌다. 하지만 이마저 계획만 있을 뿐 확보된 예산조차 없다는 대답뿐이다.

국어사전에 ‘소통’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해 주안역 추락사를 계기로 ‘우리는 생명을 담보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시각장애인들의 절규가 소통이 아닌 불통으로 메아리쳐 올 뿐이다. 사회복지예산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주장하지만 생명보다 우선하는 예산이 있을까? 전 역사에 스크린도어 설치를 열망하는 시각장애인들의 간절한 소원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다가오는 2012년 임진년 연말에는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의미의 ‘유지경성(있을 유有, 뜻 지志, 마침내 경竟, 이룰 성成)’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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