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회 점자기념일 수필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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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점자기념일 수필 공모전
  • 편집부
  • 승인 201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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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부문 대상김연숙/대구미래대학교

인천시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는 11월 4일 점자의 날을 맞이해 한글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애맹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84회 점자기념일 수필 공모전’을 개최했다. 지난 9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시각장애인 및 인천시민을 대상으로 진행된 공모전은 시각장애인부, 비장애인부, 학생부로 나눠 진행됐다. 본지는 각 부문의 최우수작을 소개한다.

★ 시각장애인 부문 (대상 : 전국 등록시각장애인)

손으로 읽는 글씨

김연숙 / 대구미래대학교

길바닥에 닿는 발걸음 소리마저 얼어붙게 하던 12월, 눈앞에 보이는 뿌연 세상만큼 암담한 미래에 절망하며 청주맹학교에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가까이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눈은 점점 더 나빠졌다. 눈앞에서 사물들이 사라질수록 온몸이 조여드는 절망감에 두려워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러다간 평생 사람구실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또 울어야 했다. 수술을 받고 몇 달 동안 시력이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 정신은 낡은 책가방처럼 해어졌다. 더불어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누워 지내는 날이 늘어갔다. 나 혼자뿐이었다. 식구들은 안타까워했지만 내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대학 다니는 친구들의 소식 하나하나에 속상해하며 짜증을 부렸다. 무기력한 내 처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가장 절망스러웠던 건 이 사회에서 나의 존재감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김연숙’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스물두 살!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활기차게 누벼야 할 나이에, 시골 구석방에 누워서 ‘오늘은 얼마만큼 보이나’ ‘해바라기가 피었나?’ 이렇게 시력을 가늠해 보는 일상이 고작이었다.

집에만 있으니 자연히 라디오가 친구였다. 이렇게 바보처럼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라디오 채널을 돌려가며 장애인 재활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들었다. 그러다가 ‘내일은 푸른 하늘’이란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어 사연을 보냈다. 누군가가 듣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말 연락이 왔다. 청주맹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눈이 안 보여도 배워야 된다. 시각장애인도 대학에 가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씀에 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바라던 바였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 내가 쓴 글을 직접 읽고 싶다는 소망. 그러나 무엇보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학교로 오라는 말씀에 두말 않고 청주로 갔다. 그러나 막상 교문으로 들어서는 마음은 무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던 생각, 여러 번의 수술, 눈이 보이지 않아 절망하며 흘렸던 눈물들······.

아픈 기억들이 목이 메도록 밀려 왔다.

“들어가 보자”

엄마가 재촉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교무실 안의 풍경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시각장애인 선생님이 여러 분 있었는데 안내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녔다. 점자를 직접 읽어 보이기도 했다. 복도에선 아이들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어디에선 청소를 하는지 시끌시끌했다. 정말 생경한 풍경이었다. 나도 여기서 교육을 받으면 저렇게 혼자 생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우선 배우고 싶은 열망이 더 컸기에 자신감은 있었다. 다음날부터 4학년 교실에서 점자를 배웠다. ‘아’는 ‘1-2-6’ ‘야’는 ‘3-4-5’, ‘기역’은 ‘4젼, ‘니은’은 ‘1-4젼, 막상 점자를 외우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읽고 쓰는 것이 어려웠다. 처음에 점자가 손에 잡히질 않아 답답했다. 1-2점인지 1-5점인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책을 집어 던지기도 했지만 시각장애인으로 평생 살아가야 하는 내가 점자를 외면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생각을 다잡은 뒤 점자를 만지고 익혔다. 남보다 앞서 가고 싶은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잘 때는 책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점자를 잘 읽을 수 있을까?’ 자나 깨나 점자 생각뿐이었다.

이런 열정에 비례해서 어깨, 팔,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어떤 날은 손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 흐르니 점자가 어느 정도 손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손끝에 만져지는 세상은 참으로 무한했다. 손가락이 지나가면 시가 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손끝에서 영어며 일본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글자를 처음 깨친 사람의 감격스러움이 이런 것일까?

그동안 독서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라도 하듯이 성경이며 잡지, 소설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눈으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눈으로 볼 때는 스쳐 지나던 것들이 점자로 읽으니 자세하게 보였다. 점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어야 하니까 더 정확했다. 잘못 알고 있던 맞춤법도 많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일기를 쓰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기쓰기는 오랫동안의 습관이었다. 점자로 일기를 쓰게 된 건 시각장애인이 된 새로운 나와의 만남이었다. 점자로 글을 쓰게 된 그 자체가 장애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 듯하다.

점자를 알고 나니 문맹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점자는 참 과학적인 글자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글 점자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기본 모음에서 좌우 대칭이 되는 원리, 기본 자음에서 첫소리와 끝소리를 만들 때 상하 좌우 대칭구조, 약자나 약어를 만든 원리 등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열정을 쏟았는지 알 만하다. 좀 더 쉽고 간단하게 점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시각장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한글 점자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왜 한글 점자를 ‘훈맹정음’이라고 하는지 알 듯하다.

요즘 점자를 만지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하다. 이 점자를 몰랐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점자를 배우고 재활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직업을 갖게 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대학입시에도 도전해 보았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갖게 된 것도 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날은 점자를 읽다가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다. 그저 고마운 마음에.

시각장애로 인해 문맹인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점자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언어는 세태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고 본래 만든 취지와는 다르게 쓰이기도 한다. 젊은 층에서 쓰는 문자 메시지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귀중한 우리의 글 한글을 바르게 써야 하듯이 한글 점자 또한 정확하고 바르게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동글동글한 점을 만지면서 우리 시각장애인들도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띠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리라 믿는다.

“엄마 손에는 눈이 달렸네.”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옆에 와서 참견하는 작은아들. 그래그래, 해바라기의 가슴시린 노란빛을 볼 수 없어도, 손끝으로 책 읽는 엄마를 보며 자라는 아들 앞에서 점자를 훑는 내 손끝은 바빠진다.

★ 비장애인 부문 (대상 : 인천 거주 비장애인)

마음으로 보는 아이들

김수희 / 세화유치원 교사

봄 햇살이 따뜻한 어느 봄날 유치원 교사였던 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유치원을 그만두고 잠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이라는 곳에서 피아노 강사를 모집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인연이 되어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아동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처음 시각장애 아이들을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만남은 무척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소개를 나누고 레슨을 시작하였지만 첫날은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놀고, 악보를 볼 수 없는데 피아노는 어떻게 치고, 공부는 어떻게 할까 하는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앞은 볼 수 없는 아이들이지만 서로 장난치고 노는 모습이 볼 수 있는 아이들과 전혀 다를 점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청각을 살려 소리를 듣고 그대로 연주하는 능력을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또 다른 많은 능력을 받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아이들과 많이 친해지고 서로를 알아갈 무렵 복지관측에서 큰 음악회를 기획하여 아이들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아이들이 큰 무대에서 멋지게 연주할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기쁜 시간도 잠시 우리는 피나는 연습을 시작해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복지관으로 오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연주회를 하는 그날을 생각하며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때로는 내가 지치고, 또 때로는 아이들이 지쳐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처음 교육을 시작했을 때는 앞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이 피아노를 얼마나 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지만 연주회 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 늘어가는 아이들의 실력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혼자 감동하고 뭉클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연주회 날이 다가왔다. 2006년 9월 17일이었다. 너무도 소중한 날이어서 이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날씨는 매우 청명한 초가을이었다. 이제 더위도 얼마만큼은 물러가고 바깥바람을 쐬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연주회 시작은 저녁 7시였지만 나는 아침 일찍부터 조금 서둘렀다. 외출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만나 마지막으로 공연할 장소인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연습을 하였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장소에 더 익숙해져서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연습도 끝나고 리허설도 끝나고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무대에서 인사하고 피아노까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무대 뒤로 들어와서 아이들 하나하나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멋지고도 아름다운 연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아이들의 대견함에 연주회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나는 꼭 안아 주었다.

지금 나는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와 또 다른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아이들과 지냈던 2006년 한해를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것보다 내가 배운 것이 더 많았던 한해였고, 설령 앞은 볼 수 없다 해도 마음으로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던 아이들을…

지금도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꼭 세상에서 귀한 존재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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