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나타났다. 지난 2월 5일 한국수어의날을 맞아 서울에 있는 세 개 대학(서울대, 숭실대, 중앙대)의 수어동아리들이 공동으로 ‘농인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여야 정당에 정책제안서를 전달했다는 보도자료를 접하고 바로 이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세 개 대학의 대표이니 당연히 세 명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네 명이 나타났다. 물음표를 단 눈으로 쳐다보는 기자를 향해 숭실대 소리보임의 구재은이, “요즘이 동아리 대표 교체 시기에요. 저는 이제 3학년이 되면서 물러나고, 공승호 씨가 동아리를 맡게 되어 같이 나왔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2월 중순, 새 학기 개강을 앞두고 대학의 학과, 학회, 동아리들의 임원 교체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한 지 너무 오래돼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정치적’ 발언, 부담감 없지 않아
수도권 7개 대학 동아리 중 3곳 참여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사실 ‘성명서 발표’라는 행위는, 그것도 학내의 복지 문제도 아니고 ‘농인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한 대학의 동아리 차원도 아니고 세 대학의 동아리가 모여서 공동으로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동아리 회원들은 모두 뜻을 모아준 것일까.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우리 손끝사이 같은 경우 1980년대부터 활동을 했지만 사실상 이렇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리고 선배들에게 듣기로도 우리 동아리는 대중적으로 수어를 알리는 데 조금 더 포커스를 맞춰서 최대한 정치나 운동에서 멀어지자는 목표를 세우고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중앙대 손끝사이 대표 양해인의 말이다.
‘정치적’이라는 데 부담을 느낀 것은 중앙대 손끝사이만은 아니었다. 당초 ‘성명서 발표’가 제안된 것은 대학수어동아리연합 단톡방에서였다. 제안자는 중앙대 손끝사이의 양해인이었다.
“2월 3일이 한국수어의날이에요. 그런데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죠. 한국수어의날만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한국수어도, 농인들의 삶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수어와 농인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만한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 성명서를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해인의 말이다.
사실 중앙대 손끝사이는 지난해 6월 3일 농인의날에 자체적으로 농인들의 권리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한 대학의 작은 동아리가 발표한 성명서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대학과 연대해서 활동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삼성소리샘복지관에서 각 대학 수어동아리들의 연합활동을 주선했다. 덕분에 수도권의 8개 대학(중앙대, 서울대, 숭실대, 국민대, 가천대, 서강대, 동국대, 성결대)의 수어동아리 회원들이 함께 모여 친교도 나누고 봉사활동도 함께하게 되면서 각 동아리 임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이 단톡방에 양해인이 “이번 한국수어의날에 농인의 기본권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한 번 발표해 보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 시작이었다. 특히 올해는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각 정당에 성명서와 함께 정책제안서를 전달하면 좀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의견도 함께.
양해인의 제안에 응해 온 곳은 본인이 속한 중앙대를 제외한 7개 대학 중 서울대와 숭실대 단 두 곳이었다. 이같이 저조한 참여의 배경에는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함께한 3개 대학의 대표들은 풀이하고 있다.
“우리 소리보임은 사실 거의 제가 밀어붙이니까 회원들 모두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약간 걸렸지만(!). 성명서에서 요구한 세 가지 △농학교 교사의 한국수어 자격 의무화 △수어통역사 및 문자통역사의 의료기관 배치 의무화 △초중등 교육과정에 한국수어 포함이 현실적으로 너무 필요한 일이라는 데 회원들이 뜻을 모아준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농인 기본권의 문제는 정치 문제라기보다는 인권의 문제라는 거죠.” 숭실대 소리보임 구재은의 말이다.
서울대 손말사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사실 회장이 아니어서….(당일 인터뷰가 힘든 관계로, 부원인 김태연이 대신 참석했다.) 근데 회장이 연합동아리 안에서 성명서를 발표하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참여하는 게 어떨까 하며 조언을 구해 왔어요. 그래서 성명서 초안을 읽어보니 세 개 항목 모두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건데, 아직까지 안 되고 있다는 데 오히려 좀 놀랐죠. 그래서 이 상황을 바꾸는 데 우리가 작은 힘이라도 되면 동참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서울대 손말사랑 김태연의 말이다.
여야 정당 찾아 정책제안서 전달
보다 실효성 있는 추후 행보 모색 중
결국, 세 개 대학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양해인(중앙대 손끝사이)이 작성한 초안을 두고 논의에 들어갔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성명서가 완성됐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한 2월 3일 한국수어의날 하루 전, 3개 대학 중 숭실대와 중앙대가 있는 동작을 선거구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 사무실을 각각 방문, 자신들이 작성한 정책제안서와 성명서를 전달하고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자리에는 국민의힘에서는 나경원 당협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수진 의원의 수석보좌관이 참석했다. 간담회 자리에서 양당의 참석자들은 모두 “이번 총선에서 공약에 반영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간담회를 마치고 돌아나오며 학생들은 다소 씁쓸함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뭐, 당연한 사항을 요구했으니 안 된다고는 못 하겠죠. 그런데, 양쪽 다 단서가 붙더라고요. ‘경선에서 후보가 된다면~’ 또는 ‘당선이 되어 국회의원이 된다면~’이라는.”(양해인)
결국, 경선을 통과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던 것. 그래서 이걸로 끝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요구사항들이 실제로 어느 당의 공약이 되기 위해서는 중앙당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차차 의견을 모아야겠지만 국회의원 후보가 확정되면, 지역구 후보는 물론 비례대표 후보 등을 찾아서 우리의 의견을 정책 제안 형식으로 다시 한번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회장이 바뀌고 학기 중이라 관심이 처질 수는 있지만, 그래서 더욱더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 많은 매체에서 조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이들 세 대학 수어동아리들의 의견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캠퍼스에서 만나는 장애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교육이 가장 큰 문제인 거 같아요. 통합교육 현장에서 특수교사의 수 부족도 문제이고, 특수교사들의 장애 유형에 따른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장애인들의 교육권이 충분히 보장될 수 없는 환경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성명서에도 밝혔듯이 농인들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농학교 교사의 한국수어 자격 의무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숭실대 소리보임 구재은)
“학교도 마찬가지지만 공공장소에서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대전이 집인데, 대전에는 서울보다 편의시설이 더 없어요. 대전도 대도시인데 그런 지경이라면 소도시로 갈수록 더하겠죠?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을 더 많이 확대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지원 서비스,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 통역 등등의 서비스 지원 절차도 간소화해서 누구나 편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픈 청각장애인이 병원이나 약국에 갔는데, 수어통역이 안 돼서 진료나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거 아니겠어요?”(서울대 손말사랑 김태연)
“저는 장애인에 국한해서가 아니라 소외계층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똑같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살아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그래요, 나도 행복해야죠 당연히. 하지만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야 비로소 나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전공하는 AI 기술이 장애인은 물론 소외계층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숭실대 소리보임 공승호)
“저는 2년 동안 장애학생 도우미 활동을 학교에서 했습니다. 그러면서 보고 느낀 것인데, 장애학생 지원이 너무 적고 부적절해요. 한 예로 영문 수업이 많은 학과를 전공하는 청각장애학생이 있었습니다. 청각장애학생은 주로 대필 지원을 받는데, 영문 대필 지원 속기사가 없다고 일반 학생이 대필 지원을 하는 거예요. 당연히 제대로 지원할 수가 없죠. 결국, 그 청각장애학생이 학교를 그만두더라고요.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학에서조차 이렇게 장애에 대한 당연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 일반으로 나가면 어떻겠어요? 성명서에서 초중등 과정에서 수어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교양과목으로 한국수어가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중앙대 손끝사이 양해인)
나름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히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대학생들이다. 장애‘판’에서의 ‘운동’가들이 아닌 ‘청춘’들이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아직은 작은 북소리지만 점점 더 커져 대포 소리가 되길 기대해 본다.
서울대 손말사랑은 1989년에 결성되어, 올해로 35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서울대학교 장수 중앙동아리다. 손말사랑에서는 수어를 배우고 수어를 활용한 봉사와 공연을 진행한다. 2024년 2월 현재 60명가량의 부원이 등록되어 있다. 사진은 지난해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부활한 ‘수어제’ 후의 기념사진이다. ‘수어제’는 배우들 모두가 농인이라는 가정하에 진행되는 수어 연극으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각색, 번역해 공연했다. 청인 관객을 위해 대본을 녹음해 함께 제공, 학내외 청인에게 수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숭실대 소리보임은 ‘수어’의 상징성을 담은 이름을 동아리 이름으로 하고 있다. 현재 약 40명이 동아리 회원들이 자체적인 수어 멘토링과 삼성소리샘복지관과의 연계 봉사활동, 농문화 이해를 위한 영상 시청 및 탐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대와 봉사, 배움에 동아리 활동의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회원 모두가 배운다는 자세로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수어 대중화를 위해 교내 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사진은 삼성샘소리복지관의 여름 축제 봉사활동에 참여한 후 찍은 동아리 단체 사진이다.
중앙대 손끝사이는 1987년 만들어진, 국내 대학 수어동아리 중 가장 오래된 수어 동아리 중 하나다. 학내·외에서 수어·농인·농문화를 중심으로 장애에 관한 인권 인식 제고 및 권리 확충을 위한 각종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3년 11월에는 13개 대학 단위로 구성된 장애인권대학생청년네트워크의 정단위로 가입해 장애인권 전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신입생 환영회 후 단체 사진. 당초 ‘손짓사랑’이었던 동아리 이름을 올해부터 ‘손끝사이’로 바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