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찰노예사건 판결’ 대법원 장애인식 수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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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찰노예사건 판결’ 대법원 장애인식 수준 우려된다
  • 편집부
  • 승인 2024.02.08 09:00
  • 수정 2024-02-07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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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사찰에서 주지로부터 노동착취와 폭행, 폭언을 당한 지적장애인이 가까스로 탈출해 수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1심과 2심에서 승소했으나, 대법원이 결과를 뒤집고 원심판결을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해 논란이 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차별’이 없었고 ‘악의성’도 증명되지 않았다는 취지다. 지적장애인인 당사자 외에도 비장애인 여러 명이 별도의 급여를 받지 못했고, 이미 벌금형이 확정된 폭행에 대해서도 장애인·비장애인 여부와 무관하게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미’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 이유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우리나라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장애인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보도에 따르면, 가해자 주지는 30여 년 동안 지적장애인을 상대로 노동착취는 물론 상습적인 폭언과 폭력에 피해자 명의로 아파트까지 구입했다. 학대를 견디다 못해 탈출한 피해자 측 신고로 수사가 이뤄졌으나 ‘단순 폭행’이라며 벌금 500만 원의 약식명령으로 끝날 뻔했다. 이에 불복한 피해자 가족과 장애인단체가 폭행은 물론 강제노동과 명의도용 혐의로 고발해 재수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경찰은 노동력 착취가 아니라 ‘울력’이었다는 가해자 측 말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재판 결과, 1심 법원은 가해자에게 1년, 2심은 감형해 8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원심 재판부는 ‘울력’의 정도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노예나 다름없었다는 점을 그나마 인정했다.

그러나 피고인의 상고 결과, 대법원은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피해자를 “주지 스님이 32년 동안 거주하게 하며 피해자 및 부모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를 스님으로 대우했다.”며 ‘장애인차별금지법(장차법)’ 위반에 대해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한술 더 떠 대법원은 “사찰 내 종교적 사역에 비장애인 스님과 같은 지위에서 참여하도록 한 피고인의 조치가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이라고 하는 ‘장차법’의 취지에 오히려 부합한다.”고 해괴한 논리를 폈다. 어처구니없는 사례는 2019년 ‘잠실야구장 노예사건’에서도 나왔다. 가해자인 친형이 ‘지속적으로 지적장애인 동생을 살펴왔다’는 이유로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아니고 뭐겠는가.

대법원 논리대로라면 장애인을 먹여주고 재워주면 어떤 불법 행위도 모두 무죄란 말인가. 비장애인과 똑같이만 학대하면 어떤 장애인 학대도 장애인차별이 아니란 말인가. 장애인 학대의 특수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결과다. 비상식적인 논리에 근거한 이번 판결로 대법원은 사법부의 신뢰를 스스로 내팽개쳤다. 염전노예사건 이후 정부는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을 설립하고 처벌을 강화했다지만 달라진 게 없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데 범죄가 줄어들겠는가. 서울중앙지법이 장애인 관련 사건을 처리하는 ‘장애인 전문 재판부’ 설치를 추진한다고 한다. ‘장애인사법지원관’ 배치도 좋지만 ‘장애인 전문 재판부’ 성공 여부의 관건은 재판을 맡을 판관의 ‘장애 감수성’ 유무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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