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I can do it!(아이 캔 두 잇!)
상태바
[단상]I can do it!(아이 캔 두 잇!)
  • 편집부
  • 승인 2023.11.30 11:06
  • 수정 2023-11-30 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승준/시각장애인 칼럼니스트

글자가 처음 생겨났을 때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그것이 없던 때에 비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문자가 없던 때에 너나 할 것 없이 듣고 외우고 말하는 방식으로 정보전달이 이루어졌겠지만, 글자의 탄생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다수와 소수 혹은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적을 수 있는 이들은 적지 못하는 이들에 비해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고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읽지 못하는 이들에 비해 지식을 손쉽게 얻게 되었을 거다. 힘을 가지게 된 사람들 입장에서 그 사건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족한 이라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글자를 볼 수 있는 사람 중 일부는 다수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돕고 싶어했다.

소리 내 글자를 읽어주기도 했고 다른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매체를 만들려는 시도도 했다. 많은 사람은 시각장애인들을 글씨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 여겼지만 어떤 이들은 글자라는 것이 다수만을 위해서 설계되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다름이 불편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인을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닌 글자 발명의 피해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여전히 볼 수 없는 이들도 지식을 공유할 수 있고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동료라고 여겼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결국 점자를 발명하고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프린트된 글자마저 읽어내는 OCR 기술까지 개발했다. 수백 년, 수천 년 보지 못하는 이들의 가능성에 주목한 이들 덕분에 지금의 나는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문자를 읽고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큼은 보는 이들에 비해 약자성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높은 건물이 생기고 계단이라는 것이 그것을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때도 걷지 못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오르지 못하는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세상에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많아진 이들을 사람들은 역시나 장애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때에도 걷지 않고도 높은 곳에 오를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리프트가 만들어지고 엘리베이터가 발명되면서 우리는 가능성을 믿은 이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했다. 휠체어 탄 친구와 루프톱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한 끼를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메뉴판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과 누구라도 높은 것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덕분이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 여겨질 수 있지만 오래전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보지 못하는 이들이 글씨를 읽고 걷지 못하는 이가 건물의 꼭대기를 스스로 오르는 것은 믿기 힘든 기적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만들어진 기적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이와 하지 못하는 이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난 조금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 수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거동이 불편한 제자들의 밥을 먹여주기도 한다. 낯선 곳을 혼자 여행하기도 하지만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안내해서 길을 찾아주기도 한다. 불편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내 상태나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한 대회에 학생을 인솔하여 출전했다. 오랜 시간 연습하고 준비한 덕분으로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대회 본선에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자와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이어진 담당자의 질문에는 또 다른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본선에 출전할 땐 다른 인솔 선생님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와 단체의 사정을 말하며 예의 있는 말투로 건넨 제안이었지만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듣지 않아도 될 말임이 분명했다. 그들의 판단대로 난 비장애인 교사에 비해 낯선 공간에서 학생을 인솔하기에 다소 부족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다른 인솔자에 비해 부족한 탓이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인솔자가 될 수도 있다는 준비를 하지 않은 대회주최 측의 준비 부족에서 기인한다.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는 주최 측의 사정을 받아들여 다른 선생님을 추천해 드리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의 마음마저 완전히 다독일 수는 없었다.

인솔을 할 수 있는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로 구분되는 기준이 이어진다면 시각장애인인 나 같은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한 이’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수밖에 없다. 장애를 기준으로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모두 지금의 자리에서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믿은 이들의 강한 신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당신도 상상 못 할 기준으로 어디에선가 배제되고 소외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무언가 함께할 수 없는 친구가 곁에 있다면 그가 함께할 방법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배제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아직 부족한 준비가 있을 뿐이다.

“I can do it”, “You ca do it”, “We can do it.” 우리는 끊임없이 주문을 외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