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특집/탈시설 당사자가 말하는 탈시설]“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지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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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특집/탈시설 당사자가 말하는 탈시설]“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지역사회”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3.09.14 09:00
  • 수정 2023-09-13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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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일 인천지역 최초로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시설에서 나와 자립에 성공한 당사자 7명이 증언자로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이날 증언대에 오른 7명 중 3명의 증언을 요약해 싣는다. 장애인 관련 가장 첨예한 이슈인 탈시설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들, 특히 오랜 시간을 시설에 보낸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들어볼 좋은 기회다. 이날 증언대회를 주관한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는 장애인거주시설을 비롯한 수용시설에서 자립한 장애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2023년 현재 3개의 지역지부가 있으며, 인천지부는 지난 4월 20일 출범했다. -정은경 기자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 증언대회에 증인으로 나선 당사자들.(왼쪽부터 신소희, 이봄, 신경수, 정병환, 유명자, 신동문, 박성호

 

  증언 1_박성호

“나와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박성호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민들레센터)의 자조모임 시나모(시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 대표다. 18살 때에 시설에 들어가 18년을 생활하고 5년 전에 시설에서 나왔다. 민들레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주택에서 생활하다 올 8월 LH 아파트에 입주, 완전한 자립을 이루었다. 중증뇌병변장애를 갖고 있지만 밝은 성격만큼이나 적극적이다.

시설은 들어가는 건 쉬웠는데,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처음 들어간 시설은 장애인시설이 아니라 보육원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가시면서 시설에 맡겨졌죠. 


시설에서 낮에는 낚싯대를 만들었죠. 하루 6시간 일했는데, 한 달에 7만 원 받았어요. 15년을 일했는데, 내게 돌아온 건 없어요. 다 병원비, 수술비로 나갔죠. 작업을 하다 불량이 나면 직원에게 불려가기도 하고, 나이 많은 형들 말을 안 들으면 맞기도 했어요. 선생님들도 형들이 때린다는 걸 알고도 묵인했습니다. 


 시설에서 사업을 따서 체험홈을 운영해서 거기 들어갔는데, 자립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집을 구해야 자립을 하는 건데 그걸 함께해주지 않거든요. 체험홈에서 여러 자립생활센터는 물론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고 자조 모임을 해보니 ‘이 사람들도 잘 사는구나. 나도 태어났는데 저렇게 한번 살아 보자.’ 하고 퇴소를 결심했어요. 민들레센터 체험홈에서 1년 살다가 자립주택으로 옮겼죠. 


내가 나간다고 하니 시설에서 태클을 걸었어요. “나가면 두 번 다시 못 들어온다.” “집을 못 구하면 어떡하냐?”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바깥에서 죽는다. 노숙자 돼도 좋다.”고 말했죠. 


처음에는 혼자 영화 보는 것도 두려웠어요. 그런데 막상 혼자 해 보니까 단체로 왔을 때보다 편했어요. 시설에서는 너무 단체로만 움직이다 보니 ‘나는 못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돼요. 직접 해봐야 해요. ‘나와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껴봐야 해요. 


시설과 자립생활의 가장 큰 차이는 ‘나’의 생활이라는 것이에요. 내 세탁기, 내 냉장고를 쓸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갈 수 있죠. 내가 원하는 대로 한 명의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지원을 받으면서 말이에요. 


완전히 자립을 한 이후에는 내 이름으로 세금을 내고 있는데, 이게 참 기뻐요. 이제야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받는 느낌이에요. ‘이런 게 사는 거다.’ 싶어요. 내가 국민으로 인정받는 것. 


물론 (시설에서) 나와서 지내면 어려운 점도 있어요. 수급비만으로는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수급비는 조금밖에 오르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수급비도 올라야 하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져야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자조모임을 하는데, 다른 무엇보다 함께 집회에 참가할 때가 가장 즐겁고 뿌듯해요.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함께하는 거니까요. 나는 우리가 세상에 많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와서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우리인데, 우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자꾸 장애인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 같아요. 자꾸 장애인들을 시설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이 사회에 보여야 하죠. 우리도 똑같이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탈시설은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에요. 


증언 2_유명자

“처음 해본 말, 저 시설에서 나갈래요”

유명자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민들레센터)의 회원이며 활동가다. 10살 때 들어갔던 시설에서 26년 만에 나와 혼자 살고 있다. 자립을 하면서 잊고 있던 가족과도 재회하고 가족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민들레 자조모임 여수다와 전동축구클럽에서 열심히 활동 중이다. 심한 뇌병변장애지만 활동지원사의 지원과 AAC(보완대체 의사소통)를 활용하며 일상을 ‘잘’ 영위하고 있다

나는 시설에서 나온 지 10년이 넘었어요. 10살 때 시설에 보내졌다가 종교시설인 □□□로 보내져 그곳에서 26년을 살았죠.


어느 날 □□□에도 탈시설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한 친구가 시설 밖으로 나간다고 했어요. 뭔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순간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10분쯤 후, 처음 보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내게 와서 “시설에서 나가고 싶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어요. “네!” 내게 왔던 사람은 지금의 민들레장애인야학 박길연 대표님이었어요. 


 박길연 대표님은 내 답을 듣고 1층 사무실에 들어갔어요. 겁이 나서 심장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박 대표님은 수녀한테 ‘유명자 씨가 퇴소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유명자 씨는 말을 못 해서 다른 분과 소통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내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아무도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박길연 대표님이 나한테 다시 와서 “수녀 원장님한테 시설에서 나가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대표님과 같이 사무실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저 시설에서 나갈래요.”라고 말했습니다. 말하고 나서 먼저 나왔는데 이후에 사무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나가면 안 된다고 했겠죠. 얼마 뒤에 박길연 대표님이 나와서는 나한테 말했습니다. “유명자 씨, 함께 나가면 돼요.”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요. 시설에서 나올 때 수녀 원장이 나한테 힘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런 수녀 원장한테 한마디 남기고 왔습니다. “죽어도 안 들어올 거예요.” 제 나이 36살에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설을 박차고 처음 나왔을 때 당연히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활동지원 시간이 모자라서 활동지원사가 퇴근하기 전에 미리 떠 놓은 물을 조금씩 마셔야 했어요. 어느 날은 활동지원사가 창문을 열고 퇴근했는데 밤에 비가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방으로 들이치는 비를 맞았어요. 그런데 나는 그날이 행복했습니다. 시설에선 아예 나갈 수 없으니 비도 맞을 수 없었거든요. 비를 맞으면서 오히려 자유를 느꼈어요. 지금은 활동지원 24시간 서비스를 받고 있어요.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사람으로 안 보고 돈으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장애인을 감옥 같은 시설로 보내고, 어렵게 탈시설 해서도 예산을 아끼느라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 거겠죠.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시설은 감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지역사회에서 살면서 부족한 점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갈 때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습니다. 지금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지역사회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지역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증언3_이봄

“나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봄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인천지부 대표다. 5살 무렵 장애인거주시설에 들어가 12살까지 지내다 서울의 공동생활가정으로 옮겨져 2017년 12월까지 살았다. 2018년 1월 탈시설했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재학 중이다. 졸업하면 서울문화예술학교 연극영화과에 편입할 생각이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지난 8월부터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료상담가로 일하고 있다. 

나는 시설 생활에서 목욕을 같이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시설에서는 목욕하는 날이 정해져 있어요. 목욕하는 날이 되면 복도에 쫙 앉혀놔요. 아직 목욕할 순서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순서가 되면 탕에 들어가라고 하죠. 같이 씻는 그 자체도 싫은데, 큰 빨간 다라이(일본어, 대야)에 물을 받아 몇 명씩 들어가서 같이 씻었어요. 애들이 다들 작으니 가능했던 거죠. 그런데 어리든 크든, 같은 여자라도 같이 씻는 거 싫잖아요. 나도 인권이 있는데….


누가 시설에 온다고 하면 미리 교육을 시켜요. 말할 수 있는 사람, 머리 좀 쓰는 사람들을 불러요. 그러면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할까 봐 말이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지 마라,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해요. 저도 그때는 거기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안 좋은 이야기는 안 하게 됐어요.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간 적이 있어요. 어렸으니까 하라고 해서 하긴 했는데, 그 어릴 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원래 시설 퇴소 후에 서울에서 살려고 그룹홈에서 단기거주시설을 알아봐 주었어요. 근데 6개월 안에 집을 못 구하면 다시 시설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다시 돌아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무작정 월세를 구하려 했다가 너무 비싸서 인천까지 내려온 거거든요. 그때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 티오가 없었어요. 센터에서 저한테 월세 구해서 살다가 체험홈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 일단 월세를 계약해서 살았죠. 그 뒤에 다른 체험홈에 티오가 생겨서 입주하겠냐고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미 혼자 사는 맛을 느낀 나는 체험홈에 안 들어간다고 했어요. 체험홈도 다른 사람들이랑 살아야 하고 일정 정도는 센터에서 터치가 있으니까요. 저는 혼자 살기 이전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쉬움은 있죠. 제가 만약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저는 이렇게까지 시설에 오래 살지 않았을 거예요. 차근차근 준비해서 성인이 되자마자 나왔을 것 같아요. 


지금 정부에서 1인 1실로 시설을 고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하지만 나는 소규모든 대규모든 시설 자체가 싫어요. 어쨌든 1인 1실이라도 같이 살아야 하고, 그러면 성격이 안 맞아도 맞춰가야 하는 여러 문제가 있으니까요. 정부에서는 ‘탈시설 하고 싶다는 사람이 얼마 안 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정부가 했던 장애인거주시설 전수조사가 현실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설에서는 장애인이 다른 사람한테 시설을 나쁘게 표현하는 말은 아예 못 하게 하니까요. 


또 하나의 문제는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만 조사하기 때문이에요. 시설에서 못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소통이 어려운 분들이에요. 저는 너무너무 답답해요. 시설에 들어가는 건 쉬운데 나가는 건 법적 절차가 복잡하다면서 쉽게 나가지 못하게 하잖아요. 탈시설이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아예 서비스 체계가 구축된다면, 그리고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법이 마련이 된다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장애인한테 묻는 게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탈시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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