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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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 편집부
  • 승인 2022.06.09 09:43
  • 수정 2022-12-15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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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_시각장애인 칼럼니스트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은 눈이 잘 보이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에 비해 대체로 느린 편이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빨리 걸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팡이 끝에 느낌으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면서 걷는 것은 세심한 조심성을 필요로 한다.
 익숙한 길에서 지팡이 없이 예민한 감각을 활용해서 뛰듯이 움직이는 시각장애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없던 장애물에 크게 부딪혀 본 경험이 있다거나, 예고 없이 시작된 공사장으로 돌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는 이라면 걸음 속도를 높이는 것이 천천히 안전하게 걷는 것보다 유의미한 이득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나름 튼튼한 다리를 가진 내 걸음도 그런 이유로 다른 이들의 움직임에 비해 느리다. 빠른 걸음으로 5분이면 도착하는 집 앞 지하철역도 내 속도로는 10분 이상 걸리고 다른 이에게는 30분이면 넉넉한 출근길도 나는 40분 이상을 소요한다.  지팡이를 짚고 뚜벅뚜벅 걷고 있다 보면 내 뒤를 걷던 사람들은 하나둘 나를 앞지르고 지나간다. 나보다 늦은 시간에 집을 나온 사람이 나보다 앞선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내가 건너지 못한 신호에 건널목을 건너기도 한다. 남들보다 빠르게 걷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세상 중요한 과제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뒤처지는 느낌은 그리 반가운 일도 아니다.
 어느 날인가는 큰맘 먹고 앞서 걸어보려고 속도를 높여보기도 하고 계단이라도 빨리 올라보려고 다리에 힘을 주기도 하지만, 마음먹고 출근길을 달리는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바로 앞에서 닫혀버리는 지하철 문과 몇 걸음 차이로 떠나보내는 버스를 마주하고 나면 오늘의 도착 시간도 지도 앱에서 알려주는 보통 사람의 소요시간을 훌쩍 넘긴다. 때로는 억울하기도 때로는 부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도착해야 할 시간에 늦거나 지각한 적은 거의 없다. 남들보다 느리지만, 그들보다 그만큼 일찍 나오면 같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때로는 팔을 빌려주는 이름 모를 이웃의 도움으로 내 걸음이 빨라지기도 하고 차를 태워주는 동료의 등장으로 내 이동시간이 줄어들기도 한다. 기상 시간을 앞당기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내 움직임은 빨라지기도 하지만 남들처럼 일어나고 나 혼자 걸어도 조금 느릴 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
 언제나 더디고 항상 느리지만 내 시간은 흐르고 가야 할 목적지에 나도 있다. 몇 분 정도 느리게 도착한다고 해서 그곳에서 내가 해야 할 큰 목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시간이 모두 다르듯 내 시간은 조금 느리지만 나도 오늘 하루를 살고 그 발걸음에는 나만의 의미를 담았다. 남들보다 잘 살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 주저리주저리 말할 것들이 있고, 함께 나눌 경험들이 있는 걸 보면 난 내가 와야 할 곳으로 대략 잘 온 것 같다. 그리고 가야 할 곳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월요일 아침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먼저 준비를 하려고 한다. 조금 더딘 일은 퇴근 시간이 지난 후 남아서 채워두려고 한다.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는 약간의 운동으로 풀어내고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는 주말의 늦잠으로 회복하려고 한다. 난 나만의 속도 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채우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내 걸음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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