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후견제도의 역사적 성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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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후견제도의 역사적 성격과 과제
  • 박인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20.07.24 10:48
  • 수정 2020-07-2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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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금치산자・한정치산자제도는 정신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행위능력을 획일적으로 박탈하고 그 대신에 후견인에게 포괄적 법정대리권 또는 동의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피후견인은 자기 삶에 있어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후견인의 결정에 따른 삶을 강요당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구 프랑스민법(나폴레옹민법전)의 성년자보호제도를 본받은 의용민법(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적용된 구 일본민법)의 금치산・준금치산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구 프랑스민법은 후견(後見, tutelle), 보좌(保佐, curatelle) 제도를 두었는데, 이는 로마법에 그 기원을 둔 것이었다. 로마법에서는 자주권자(自主權者, persona sui iuris 家長 또는 家長權에서 해방된 家男)에게만 행위능력이 있고, 유아, 미성숙자(7세 ~ 14세 미만의 남성 12세 미만의 여성), 여성, 정신이상자, 낭비자에게는 행위능력이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후견(tutela)과 보좌(cura)제도가 발달하였다. 로마법 이래 후견제도는 본인의 판단능력의 결여 또는 부족 때문에 가산(家産)이 산일(散逸)되어 가족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됨으로써 본인 또는 그 가족의 생계가 곤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20세기초 근대 민법전의 성립 당시의 성년후견 역시 본인 보호의 명목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가족 전체의 생계와 존속을 위하여 상속으로 전래된 가산(家産)의 유지 보전을 위한 제도이었다. 따라서 그 명의의 재산이 없거나 재산관리권이 없는 가속(家屬)의 경우에는 후견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후견인의 주된 역할은 본인의 의사 등과는 관계없이 추후 상속의 시점까지 본인 명의의 가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었고 본인의 신상보호와 같은 것은 재산관리에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금치산자・한정치산제도는 실제로는 잘 이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의사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재산관리나 신상에 관한 결정은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부모나 자녀 등 근친의 가족들이 이를 대신 행사하였다. 이는 혈연적으로 가까운 가족이 누구보다도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해 줄 것이라는 전통적 가족주의관념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사실상의 후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러한 관행은 개인주의에 의거한 현대 사법제도와 충돌하며 상당한 법적 불안정성을 낳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근친 이외에 달리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후견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판단능력이 부족한 가족구성원의 재산관리와 관련하여 가족 간에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가족 중에 누가 적법한 재산관리자가 될 것인가를 확정하기 위하여 법원에 후견개시청구를 하였다. 문제는 가족에 의한 사실상의 후견이 부적법하거나 탈법적 관행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절한 후견감독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본인의 권리나 이익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특히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핵가족제도가 확산되면서 전통적 가족주의적 관념은 급속히 붕괴되고 가족 간의 이해의 충돌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 금치산・한정치산자제도는 대안이 되지 못하였는데, 무엇보다도 본인의 법적능력을 획일적으로 박탈(행위능력의 제한)하고 후견인에게 본인을 위한 포괄적 권한(법정대리권)을 부여함으로써 본인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성년후견제도 도입이 요청된 까닭이다. 따라서 새로운 성년후견제도 도입에 있어서는 자기결정권 및 본인의사 존중이 강조되었고 그동안 불투명하였던 본인의 신상보호에 관하여 가정법원이 후견인에게 신상결정권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피후견인 보호에 있어서 법적 공백이 제거되고 피후견인의 신상보호가 재산관리와 더불어 본연의 후견인의 임무로 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는 장애인인권 존중의 관점에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종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법적능력을 제한하고 후견인이 장애인 본인의 의사결정을 대체(substitute decision-making)하는 성년후견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CRPD)을 근거로 본인의 법적능력의 향유를 인정하고 법적능력의 행사에 필요한 의사결정지원(supported decision-making)제도로 전환하라는 국제적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행위능력의 제한과 의사결정대행을 두 기둥으로 구성된 성년후견제도에 대하여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동 협약 이행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보고서의 심의 후 공표한 최종견해(concluding observation)에서, 새로운 성년후견제도에 관하여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신상이나 재산에 관하여 후견인으로 하여금 대신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면서 “의사결정대행에서 개인의 자율(autonomy)과 의사(will), 선호(preferences)를 존중할 뿐 아니라, 의학적 치료에 대한 동의 여부, 사법(司法), 혼인 직업 및 주거의 선택에 대한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권리를 존중하는 ... 의사결정지원으로의 수정”을 권고하였다.

현행 성년후견제도는 법정후견의 유형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후견인에게 법정대리권을 부여함으로써 피후견인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의사결정의 지원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새로운 성년후견제도에 있어서 자기결정의 존중도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의사결정능력(법률행위의 경우 의사능력)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은 그 장애 때문에 이미 자기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아무런 합리적 편의의 제공(의사결정지원) 없는 자기결정권 존중은 공허한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조력과 지원, 즉 의사결정지원이 제공되어야 하고, 의사결정능력장애인은 장애인의 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의 하나로서 의사결정지원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의사결정지원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자기결정 존중과 의사결정의 대행 사이에 존재하는 의사결정능력장애인 보호의 공백을 메우지 않으면 안 되며, 의사결정지원이야말로 성년후견제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장차 대체의사결정을 기조로 하는 한국의 새로운 성년후견제도를 의사결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로 발본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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