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꾸러기 아이들로부터 어른들이 배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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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 아이들로부터 어른들이 배워야 할 것
  • 김헌용/구룡중학교 영어교사
  • 승인 2020.04.09 10:16
  • 수정 2020-04-09 10: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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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입문한 지 어언 10년이 되었다. 중증시각장애인으로서 서울에서 일반 과목으로 교사가 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처음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학에서 갓 졸업하여 사회에 첫발을 디딘 25살 청년에게 10대 아이들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의외로 나의 장애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면 아이들이 찾아와 내가 옷은 어떻게 골라 입는지, 교과서는 어떻게 보는지, 점자는 어떻게 쓰는지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맞히면 좋아하고, 틀리면 까르르 웃으며 도망가곤 했다. 그렇게 정겹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도 수업만 시작하면 장애인에 대한 배려심 따윈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것 같았다.

학생들은 내가 시각장애인이므로 조용히 해야 수업 진행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안 보이는 선생님 앞에서는 더욱 바른 자세를 해야 한다는 얘기도 귓등으로 넘겨버렸다. 자리를 마음대로 바꿔 앉고, 친구들과 필담을 나누고,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분명한 장애인 차별이었다. 선생님의 시각장애를 이용하여 수업을 방해하는 자,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사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대신 나는 내가 가진 권한을 이용했다. 자리를 마음대로 바꿔 앉으면 벌점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심한 장난을 쳐서 두 번 이상 경고를 받은 자는 쉬는 시간에 남아 본문을 쓰고 갈 것을 명했다. 공부 시간에 놀았으니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부분 학생이 불만을 표했으나 감히 반항까지 하는 학생은 드물었다(없진 않았다). 만약 그럼에도 수업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과 상의하여 더욱 강한 조처(담임과의 긴 상담 등)를 취하였고, 그래도 안 되는 경우는 생활상담부에서 상담을 받게 하였다. 학교는 이러한 생활지도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징벌 시스템이 잘 작동하려면 내 딴에 수업도 잘 설계해야 했다. 학습지도와 생활지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수업이 앞바퀴라면 생활지도는 뒷바퀴이다.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생활지도도 어렵다. 그렇게 지난 10년을 나는 말썽꾸러기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잘 구슬려 수업에 집중하고 영어를 한 단어라도 더 배우게 할까 고민하며 살아왔다.

가끔 나의 교직 생활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묻는다. 학생들 다루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요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어디 쉬울 리가 있겠는가? 매우 어렵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들어간다. 들어가서는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럼에도 학생들이 결코 잊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다름 아닌, 내가 그들의 선생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 앞에서 짓궂은 장난을 치고, 내가 내리는 벌을 분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나의 눈을 피해(이 말에도 어폐가 있는 것은 안다) 딴짓을 하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들이 나를 선생님으로 여긴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의 장애를 그렇게까지 무시할 수가 없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교실 밖 어른들은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학부모가, 일부 동료 교사가, 그리고 아주 많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나를 교사이기 이전에 장애인으로 여기는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성별이 남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은연중에 표현하는 진짜 이유는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학생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제대로 배울까? 교사가 해야 할 일 중에는 수업 말고 다른 업무도 많은데 그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을까? 어쨌거나 장애인이 교사 생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횡단보도 기다리는 김헌용 선생님
횡단보도 기다리는 김헌용 선생님

 

다시 한번, 이 우려에도 우려할 만한 근거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우려들은 한 가지 점에서 아쉽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려에서 시작했지만, 무언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고가 뻗어가기 위해서는 그 전제에 내가 교사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장애 그 자체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까, 어떻게 하면 더 잘 근무할까에 초점이 맞게 된다.

구룡역에서 바라본 점자블록

학생들은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업 때는 여느 다른 선생님들에게 대하듯 나에게 불손하게 대했지만, 속으로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학교생활을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렇게 내가 출근하는 길에 점자 보도블록을 깔아주겠다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그들은 방법을 찾았다. 구청에 민원을 넣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리고… 몇 주 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철역에서부터 학교 교문까지 점자 보도블록이 깔렸다. 출근길에 내가 그 점자 보도블록을 밟는 순간 느낀 감동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었다.

장애 문제는 장애 문제에서 오히려 한 발 떨어져서 볼 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로부터 배웠다. ‘장애=어려움’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으면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온갖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며 호들갑 떠는 어른들이 이 아이들로부터 배우길 바란다. 학생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 나는 교사이다. 단지 장애를 가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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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2020-04-09 12:19:09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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