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사회 사람들이 바라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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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사회 사람들이 바라본 세상
  • 고은별 기자
  • 승인 2015.05.08 09:56
  • 수정 2015-05-11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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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이룸홀에서 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회장 이대섭)가 주최한 ‘수어로 공존하는 사회’라는 테마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농사회의 구성원인 농인과 코다, 수화통역사가 농사회에서 경험한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자리였다. 웃음과 감동이 함께한 생생한 토크콘서트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농인-코다-수화통역사의 이야기를 담은 토크콘서트

 

총 5명의 연사가 연설형식으로 진행

 

이번 토크콘서트는 지난해 4월 농인을 대상으로 열린 ‘데프열정락서’ 토크콘서트에 이어 한국농아인협회의 두 번째 농인 관련 토크콘서트다. 토크콘서트는 토론회라는 다소 딱딱한 형식이 아닌 5명의 참가 연사들이 농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온 이야기를 한 사람씩 무대 위에서 연설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작년 토크콘서트와 다른 특이점은 농인뿐만 아니라 코다, 수화통역사가 각각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시선으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참가 연사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한국농아인협회의 공개 모집과 추천을 통해 서류심사와 개별면접을 거쳐 선정됐으며 농인 2명(고아라, 현영옥), 수화통역사 2명(이경례, 정원철), 코다 1명(김진유)이 연설했다.

이날 콘서트에는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를 비롯해 120여명의 관객이 참가했으며 연사와 관람객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콘서트 내내 문자통역과 수화통역서비스가 제공됐다.

한국농아인협회 이대섭 회장은 개회식을 통해 “이번 토크콘서트가 농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진솔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하고 나아가 농인들의 인권과 삶의 질이 신장되는 데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애를 인정하고 난 후 찾아온 농인 발레리나의 행복

 

하늘거리는 노란 의상을 입고 등장한 고아라씨는 연설에 앞서 ‘아리랑’ 음악에 맞춰 발레 공연을 선보였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와 나풀거리는 몸짓에 관객들은 이내 무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석에서는 귀 옆에 손을 갖다 대고 반짝이며 박수를 뜻하는 수어로 큰 환호를 보냈고 그녀는 웃음으로 보답하며 본격적인 자신의 이야기에 나섰다.

그녀는 20년을 발레와 함께한 농인 발레리나다. 청력이 좋지 않는데 어떻게 음악에 맞춰 발레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그녀의 공연을 보고나면 단 번에 사라지고 만다. 물론 그녀가 지금을 맞기까지는 수많은 고뇌와 노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은 단 하나였어요. 친구들이 대통령이나 연예인처럼 조금 허황된 꿈을 말할 때에도 저의 대답은 늘 발레리나였죠. 발레리나를 꿈꾸는 과정 동안 힘든 점도 많았어요. 발레 자체로서는 인위적으로 몸의 뼈와 근육을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고 또 귀가 잘 들리지 않다보니 박자를 타는 데 어려움이 있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음악을 들어야 하는 부분도 때론 스트레스로 다가왔죠.”

그녀는 그토록 힘든 순간 속에서도 발레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로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인정했던 점을 꼽았다.

“장애를 인정하기 전에는 제 장애를 남들에게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 오해를 사기도 했고 학창시절에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렇다보니 자신감이 떨어졌고 마음의 염증은 커져만 갔죠. 그러다가 문득 장애를 당당하게 말하고 나의 장애를 인정하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그때부터 저는 누구를 만나든 간에 ‘저는 농인입니다’라고 먼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많은 변화가 생겼고 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을 장애를 인정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녀는 발레 외에도 제3회 미스데프코리아 진, 월드미스유니버시티대회 성실상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을 만큼 주어진 세상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한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

“지금이 있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 배울 게 많은 사람이기에 실수와 고민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불확실한 것이 당연하고 아직 인생은 길기에 꿈이 있다면 그 꿈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코다, 높이뛰기로 세상을 넘다

 

김진유씨는 자신을 제5회 한국국제농아영화제 상영작 ‘높이뛰기’의 영화감독이자 농부모의 청인 자녀를 뜻하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C.O.D.A)’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영화인 ‘높이뛰기’의 일부장면을 보여줬다. 코다인 주인공 어린 남자아이가 농인 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하는 장면이었다. 가게 주인은 주인공의 어머니를 벙어리라 칭하며 가격을 높여 옷을 팔고 홀대한다. 주인공 어린 남자아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분하지만 단지 코다, 농인의 자녀라는 이유로 쉽게 반격하지 못한다.

짧은 영상이 끝나고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바로 접니다. 이 영화는 10살 때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고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그는 코다로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코다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어요. 아,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에요. 그만큼 코다로서 겪었던 아픔이 많았다는 것이겠죠. 그 여러 아픔 중 가장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코다에 대한 오해였어요. 특히 코다니까 수화를 잘 할 것이라는 편견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었죠. 누군가에게 수화를 하지 못한다고 하면 대부분 놀라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때마다 농인사회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어 코다로서 살아오며 힘들었던 점으로 농인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꼽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좋았던 그는 축구, 육상, 높이뛰기 등 다양한 운동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때마다 주변의 회유가 있었다고 했다. 이유는 단지 그의 부모가 농인이었기 때문.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부모 옆을 떨어져 운동선수로서 기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효자’였던 것이었다. 결국, 주변의 끊임없는 반대 탓에 그는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낼 수 있는 영화감독을 택했다고 했다.

“영화감독이 된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코다로서 조금 더 농사회에 다가가게 됐고 그들만의 문화를 이하하게 됐죠. 코다들의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고요. 그리고 수어에도 관심이 생깁니다. 어릴 때 집에서 부모님과 나눈 몇 가지 홈사인이 전부였던 제가 이제는 수어를 배워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농인사회, 청인사회간의 이해와 공유가 넘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합니다.”

 

 

“수어로 농인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마지막 연사로 등장한 이경례씨는 32년간 수화통역을 하며 살아온 베테랑 수화통역사로 현재는 서울특별시농아인협회 중구지부 중구통역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32년간 수화통역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농언니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선 5년 전 별세한 언니와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렸다.

“7남매 중 언닌 여섯째로 저는 일곱째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손위아래다 보니 자매가 서로 시새울까 봐 부모님은 우릴 쌍둥이처럼 옷도 가방도 똑같이 해줬습니다. 종종 실수로 가방을 바꿔 학교에 갖고 가는 일도 잦았죠. 그만큼 우리 자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자매이자 죽마고우였어요. 저는 언니와 말하기 위해 우리만의 홈사인을 만들었고 그 홈사인을 통해 우리 자매의 우애는 점차 두터워져 갔습니다.”

그렇게 우애가 깊던 자매를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부모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농인 언니와 어울려 다니면 장애가 옮을까 봐 억지로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우리가 유독 함께 다니며 손짓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제가 언니의 장애가 옮을까 야단쳤고 우리를 떼어놓기 일쑤였습니다. 밤에도 일찍 전깃불을 소등해 홈사인을 못하게 했죠. 그러나 우린 이불을 뒤집어쓰고 양손으로 서로 얼굴을 더듬어가며 수화로 아버지를 흉보고 키득대며 보란 듯이 반항했습니다.”

늘 꼭 붙어 다니던 농언니 탓에 그녀는 홈사인을 넘어 자연스럽게 점차 진짜 수어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언니가 농학교에 들어가고 학교에서 정식 수어를 배워오면 그걸 보고 따라했던 것이 수어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언니 덕에 빠른 속도로 수어를 익힐 수 있었고 동네에서 가장 수어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나 여기저기서 수화통역을 요청해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수어로써 농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전했다.

“언니 덕에 수어를 시작했고 32년간 수어와 함께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수어와 수화통역은 저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제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연히 아래층에 농인들이 교통사고 입원을 해서 들어왔고 저는 그들이 사고관련 보험합의로 문제를 겪는 것을 해결해주기 위해 아픈 몸을 뒤로하고 열심히 수화통역을 해줬습니다. 그때 저는 다친 부위가 손이 아니고 다리인 것에 감사했죠. 이처럼 수화통역은 저의 운명인 것 같습니다. 물과 물고기처럼 농인과 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로서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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