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비참을 이야기하라
상태바
너의 비참을 이야기하라
  • 차미경 기자
  • 승인 2014.05.23 12:02
  • 수정 2014-05-23 1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염윤선/심장장애인 칼럼리스트, 경희대 영미문화학부(diversiti)
염윤선 / 칼럼리스트
얼마 전 4월 20일 ‘2014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서 장애인들은 한 가지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300여 명의 장애인들이 고속버스 티켓을 사고서 탑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저상고속버스를 도입하라는 요구를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저상버스를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운수업체 사장이 사과를 한 것도 아니요, 지자체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사과한 것도 아니었다. 경찰이 몰려와서 최루액을 뿌리고 고속버스에 오르고 싶다는 장애인들을 끌고 갔다. 그게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회자되어서 각종 신문에는 끌려가는 장애인의 오열하는 모습과 최루액을 맞아 괴로워하는 모습이 선정적으로 실렸다. 보라. 이 장애인들을. 보라. 이들의 비참함을.
 사건이 있은 뒤 며칠 후, 나는 지인에게 이번 퍼포먼스가 운동으로 어떤 기대할 만한 효과를 가지냐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 대답은 “그런 게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였다. ‘장애인들’ 하면 목에 팻말을 걸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그런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비참을 보여주어야만 겨우 “무슨 일이 있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장애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시위 문화가 이렇다.
 가끔 정부 관계자로부터 ‘떼쓰기 시위’가 아닌 ‘선진국적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시위’를 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돌아오는가. 이 아수라 속에서 많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더욱더 비참해져서 그 비참을 낱낱이 전시하여 그들의 호혜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이다. 끌려간 장애인들의 사진과 그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 그것이 정당했는지와 뒤늦게 나온 경찰의 사과문을 두고 아직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비참’을 다루는 어떤 나라의 방식.
 ‘너의 비참’에 관한 이야기는 비단 장애인들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천안함’ 때도 그랬지만 ‘세월호’ 관련해서도 “유족들의 우는 모습이 세련되지 못했다.”라는 말이 정부관계자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비참을 전시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럴 때마다 비참하지 않은 자들은 그 비참을 조롱한다.
 우리는 다른, 좀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비참을 겪는다. 그 비참을 정말로 ‘비참하게’ 전시하는 것은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이번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고속버스 시위 사건에 관해 미술평론가 임근준 씨는 트위터를 통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위해 모든 장애자가 한날한시에 제각각 외출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그날을 그려본다.”고 썼다. 과연 새로운, 당당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