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량품이라 칭할 때
상태바
나를 불량품이라 칭할 때
  • 편집부
  • 승인 2014.03.10 16:06
  • 수정 2014-03-10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윤선 / 심장장애인 칼럼리스트, 경희대 영미문화학부(diversiti 필자)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겠지만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격리, 유폐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많은 매스미디어에서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신화를 끊임없이 방영하고 ‘장애인임에도’ 이렇게 ‘비장애인’의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말한다.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다. 장애인들의 자기계발서, 장애를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장애인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비장애인 혹은 장애인 성공신화의 무엇을 모델로 삼는 한 여전히 고통은 남는다.
어빙 졸라는 이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장애인을 비하하고 차별하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투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에 완전히 통합될 가치가 있고 자원을 제공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잘못은 우리한테 있지 않고 우리의 병과 장애에 있지 않다. 잘못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을 요구하는 것, 사회적 구조, 정치적 우선순위와 편견에 있다.” 장애인 여성인권운동가인 로라 헐쉐는 낙태를 반대하는 일군의 수녀들이 그의 얼굴에 대고 “우리 덕분에 당신이 살아 있는 줄 알아요!”라고 외치던 1983년의 그날을 기억한다. 낙태찬성론자였던 로라 헐쉐는 자신의 생명이 누군가의 호혜로 주어지는 현실들을 모욕적으로 직시해야 했던 것이다. 장애인의 생명이란 때때로 어찌도 이리 호혜적으로 주어지는지.
우리는 이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손, 발이 기형으로 태어난 중국의 여류사진작가 이쥔산은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를 찍으며 ‘비정상’에 대해 탐구한다. 비틀어진 자신의 발을 찍은 그의 사진 제목은 ‘한번만이라도 섹시해질 수 있다면’이다. 사회가 장애인에게 요구하는 이미지-심지어 생명조차도-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우리가 합의한 적 없는 어떤 환상이다.
나는 얼마 전 누구에게 내 장애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바로 “불량품이구나”라고 말했다. 그와의 오랜 친우관계, 그가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려고 한 의도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 말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장애인으로 스스로를 자각하고 이 사회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모든 활동을 해도, 그러니까 우리 정신적, 신체적 아픔은 남는다. 고통은 존재하며 우리가 절대 비장애인과 같지 않다는 그 진실은 아프게도 남는다.
불량품. 그렇다. 나는 불량품이다. 병자는 병자라고 말해야 하고 불량품은 불량품이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그 외의 말들 혹은 그와 전혀 반대되는 말들은 ‘전략적’으로 수행될 수 있지만 자신이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부인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정말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불량품임에도’ ‘병자임에도’ ‘박탈당했음에도’ 권리를 주장하고 존재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 ‘나는 불량품이 아니야’라는 믿음으로 하는 실천들은 아주 희귀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파국만을 가져올 뿐이다.
제일 나쁜 건 그런 사람들 옆에 기생해서 “아니야 너도 온전한 인간이야. 너의 존재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이야” “너야말로 참된 인간이야”라고 속삭이는 이들이다. 나의 존재에게 침을 뱉는 사람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들은 바로 이런 자들이다.
나는 많은 장애인들이 더 나은 생활환경을 갖기를 희망함과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외면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세상이 가리고자 혹은 왜곡하고자 하는 이 ‘불량품들’이 어떤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서로 나누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
<거부 당한 몸> 수잔 웬델, 그린비출판, 2008과 <body and culture>, Greg Lyons, Pearson/Longman, 2005를 참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