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은 꿈을 꿀까?
상태바
시각장애인은 꿈을 꿀까?
  • 편집부
  • 승인 2016.02.12 09:57
  • 수정 2016-02-12 0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승준 / 한빛맹학교 수학교사
▲ 안승준 / 한빛맹학교 수학교사
 나에겐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하고 뭔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리가 있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열어보지 말라고 하는 건 어떻게든 열고 싶은 욕구가 생겼었고 들어가지 말라고 써 있는 잔디밭은 왜 그리 편한 쉼터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삼겹살은 ‘취사금지’ 표지 하나 정도는 있는 곳에서 구워야 제 맛이고 사랑의 언약 표시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접근금지 표시가 붙은 곳이라야 된다는 듯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들을 보면 나처럼 이상한 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에덴동산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사시던 아담할아버지와 이브할머니마저도 단 하나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드신 걸 보면 이건 인류가 어쩔 수 없는 고유유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방법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게 되면 그런 욕구는 얼마나 커질까?
 내게 '실명'은 그런 사건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몇 개 남겨 놓지 않았다.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오락실도 가고 싶고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렇게도 가기 싫던 학교도 가고 싶고 공부까지 하고 싶었다. 군부의 탄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어느 청년처럼 나의 욕구는 불가능이라는 선고 아래서 터질 듯이 부풀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장애 선고’라는 단편적인 사건보다 그로 인해 극도로 좁아진 독립적 생활반경과 욕구충족을 위한 총체적인 해법상실에 더 좌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내게 한 가지 작은 출구가 있었다면 그건 꿈이었다. 아직 꿈속에서는 뭐든지 볼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내 꿈의 기억력은 좋은 것 같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삼국지’ 게임 속에 나오는 장수들의 얼굴생김과 능력치를 생생한 올 컬러로 재현해내고 있었고 동전이 없어도 ‘스트리트 파이터’는 밤새도록 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도 또 자고만 싶었다. 난 꿈을 꾸기 위해 사는 것만 같았다. 재활교육을 받고 다시 학교에 입학하고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꿈에 대한 집착은 서서히 줄어들어 갔던 것 같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여러 가지 욕구들을 채워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꿈은 나의 경험 그리고 나의 생각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기억에서 어릴 적 장면들이 줄어가는 속도와 비슷하게 내가 꿈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속에서마저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 가족들의 모습은 나의 뇌도 시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시각이 아닌 나름의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꿈속에서 문제가 생겨도 점차 청각이나 촉각을 이용해서 해결해 가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실명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힘들거나 슬프지 않았던 건 그 안에서도 재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건 같았지만 보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지는 않았다.
 요즘도 가끔씩은 아주 어릴 적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고 그 안에서 많이 보고 열심히 뛰어놀긴 하지만 점점 빈도는 줄어간다.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을 인정하고 만족하는 시간들이 늘어가는 만큼 꿈을 현실의 도피처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의 이상형을 만났을 때 나의 행동들이 좀 더 대담해지고 구체적이 되어가는 걸 보면 나의 경험들과 나의 생각들도 늘어가고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악몽을 꾸기도 하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미래를 암시한다거나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꿈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건강한 생각들과 소중한 경험들이 고스란히 버무려져서 기분 좋은 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3D 가상현실 체험보다도 정밀하고 현실감 넘치는 꿈의 예술은 거의 매일 밤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또 매일 아침 나의 시작을 함께한다. 시각장애인들도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꿈을 꾸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각자가 꾸는 꿈의 모양은 많이도 다를 것이다. 오늘도 나의 꿈이 기분 좋은 생각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현실의 꿈 재료를 가꾸어 보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