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과 ‘점자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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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과 ‘점자의 배신’
  • 편집부
  • 승인 2015.10.23 09:42
  • 수정 2015-10-23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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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 / 한빛맹학교 수학교사
▲ 안승준 / 한빛맹학교 수학교사

 나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이 그렇겠지만 한 정류장에 서 있는 수많은 버스들 중에서 내가 탈 버스를 찾아내고 떠나기 전에 탄다는 것은 누구의 도움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복잡한 시내의 정류장은 그 위치가 별 의미도 없어서 저 멀리서 섰다가 떠나버리는 버스 몇 대를 놓치고 나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지하철을 택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정해진 위치에만 정차하고 소요시간의 오차도 거의 없는 지하철은 내게 있어서만큼은 버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을 준다. 비슷비슷한 역사의 구조들은 낯선 역에서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서 특별히 심하게 헤맬 염려도 없다. 새벽 첫차부터 늦은 밤 막차까지 북적이는 복잡함은 언제라도 길을 물어볼 수 있는 든든함이 되어주기도 한다.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점자안내 블록들과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무선음성 안내를 경험하다보면 지하철 복지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요즘은 전화 한 통이면 나와 주시는 안내도우미 직원분들 덕분에 낯선 환승역이나 찾기 힘든 출구에서도 별다른 걱정 없이 지하철을 이용한다.

 출퇴근부터 주말의 약속이나 출장들까지 내 생활에 있어서 지하철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이 지하철에서 조금씩 아쉬운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정한 곳에서 탑승하고 하차하는 것이 길을 찾기에 편리한 시각장애인들은 문에 적혀 있는 번호를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 1-1, 10-4처럼 열차의 량과 문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점자들은 스크린도어에 붙어 있어서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붙어 있는 방향과 높이가 제각각이어서 운이 나쁘면 문의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면서 몇 번씩 더듬거려야 한다. 속 모르는 분들은 위험하다고 문 만지지 말라고 하시지만 난 열심히 내 위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금은 위험하기도 한 것이, 가끔이긴 하지만 스크린도어가 없는 역이나 열려 있는 역에서는 아찔한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한다. 차라리 아무런 시설도 없을 때는 미리 대비를 하고 조심해서 다니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편히 가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히는 상황들이 생긴다고나 할까?

 출입구 계단에 적혀 있는 점자들도 감사하게 이용하다 보면 꼭 한 번씩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하고는 한다. 좋아하고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느낌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전과 다르게 요즘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점자를 보게 되는데 별생각 없이 장식으로 붙여놓은 것들도 많은 것 같다. 읽기도 어렵게 거꾸로 붙여놓기도 하고 남녀화장실을 반대로 붙여놓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들은 서로들 위치를 바꾸고 식당 출입구에 위험표시가 적혀 있고 회의실 앞에 화장실이라고 적힌 것도 보았다.

 건물을 짓고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점들은 아무 의미 없는 장식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겐 자그마한 점들이 커다란 전광판만큼이나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붙어 있는 점자들이 왠지 정류장 무시하고 서 있는 복잡한 버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리에만 서는 지하철처럼 낯선 위치에서 고생하는 점자들을 제자리에 붙여주었으면 좋겠다. 점자 하나를 붙이기 위해 몇 번씩 회의를 하고 정책을 만들어 낸 분들과 그것을 만들고 붙여낸 수많은 마음들이 조금 더 꼼꼼한 마무리로 빛을 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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