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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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
  • 편집부
  • 승인 2008.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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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화/신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부산사상구장애인복지관장
 

그날은 무척 바쁜 날이었다. 운영위원회를 열어 새해예산과 사업계획을 보고하고 전년도 사업실적을 평가하며 기타 사항으로 후원금 모집방안에 대한 논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운영위원들을 모두 배웅하고 우연히 가로수를 쳐다보다 입이 벌어져 버렸다. 큰 나무에 때 아닌 흰 눈꽃이 피어나 펄럭이고 있었다. 내가 어이없고 기가 막혀 “아니 저저…”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이용자들도 모두 나무를 쳐다보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화장실 두루마리를 풀어 나무에 걸쳐 놓은 것이다. 얼마나 종이를 많이 사용했으면 큰 나무 전체가 하얗게 뒤덮였겠는가. 아마도 화장실에 비치된 큰 두루마리 휴지를 몽땅 다 풀어 던진 것 같았다. 어떤 이는 옥상에서 던졌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화장실 창문으로 던졌다고 하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네에서 우리 복지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거리감을 갖는데 이런 꼴까지 보였다가는 더 편견을 가질 것 같기도 하고, 관장으로서 창피스러운 마음도 들어 얼른 남자직원을 시켜 나무 위로 올라가서 밀대자루로 걷어내게 했다. 여직원들은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휴지를 모아서 쓰레기통으로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잽싸게 일어나 휴지를 낚아채며 “아까운 휴지를 와 버리노,  우리집에 가져가서 내가 쓸란다”하며 휴지 뭉치를 빼앗아 갔다. 서서 기다리는 것도 힘겨워 길바닥에 주저앉아 계시던 분이 어쩌면 그렇게 순간적으로 날쌘돌이가 되어 낚아챘는지 마치 독수리가 어린 병아리를 순간적으로 물어가는 것만큼이나 빨라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주변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나무만 쳐다보며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그래, 맞다. 아직 안 쓴 기다. 쓸 수 있다”하며 공짜를 놓친 아쉬움을 수습하며 할머니를 거들었다. 할머니는 의기양양하고 흡족한 기분으로 휴지뭉치를 안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같이 다니시는 어르신들은 “당분간은 충분히 쓰겠다”며 할머니의 공짜선물 보따리로 자꾸만 눈길을 보냈다.

 

 아까운 휴지를 던져버린 사람에 대한 얄미운 마음 때문에 속상했던 내 마음이 알뜰한 할머니의 기지로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복지관 앞에다 공고문을 붙여 휴지를 이렇게 낭비하면 다시는 화장실에 휴지를 비치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려던 마음이 그냥 웃어버리는 것으로 그리고 주의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아마 누군가 어딘가에서 본 설치미술을 흉내 낸 것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화풀이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유리창 깨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유리 값이 더 비싸기도 하지만  다칠 수도 있고 파편이 거리로 떨어져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문제는 더 커지고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기이한 행동을 대하며 “어허 부산에 눈꽃이 폈네, 태극기가 아니라 휴지가 바람에 펄럭이네” 하며 웃어버리고, 나무에 올라가 걷어내는 직원들도 어이없는 웃음으로 때워버린 것을 보면 설치미술인지 행위예술인지 모를 행동이 우리 모두에게 작은 여유나마 주어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시는 이런 요상한 예술행위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람이다. 하기사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보다 더 회귀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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