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사회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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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사회로 희망
  • 편집부
  • 승인 2021.04.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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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남직업능력개발원장 오창식

다양성이 충만한 자연의 생명력! 생명이란 단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닌 어떠한 것이 있는 “존재 한다“의 의미가 있다. 또 생명이 존재(being)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무생물이든, 유생물이든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의 흐름을 결코 피해갈 수가 없다. 그 변화한다는 것은 완전함과 영원함이 아니라 불완전성과 유한함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원자, 세포, 돌, 나무, 동물 등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불멸과 완벽하고 완전한 것 또한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존재들은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자연의 흐름의 순리이다.

영겁의 우주 속에 한 점 같은 아니, 한 점보다 더 작은 지구가 있고, 그 지구 속에 또 수없는 무생물과 유생물이 있고, 그 무수한 유생물 중에 인간이라는 種(종)이 있다. 당연히 인간 또한 존재이기에 완전함과 영원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전성과 유한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자연의 존재에서 예외적으로 인간에게만 변화의 순리를 극복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는데 다름 아닌 이성과 연관된 “나눔“이라는 상호 공존과 의존적 속성이 있다. 인간은 유독 다른 존재와 달리 불완전성과 유한성에 대한 거부 반응이 매우 강한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기에 더욱더 상호 의존적∙보완적 나눔의 관계성에 매우 민감하다.

이런 상호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인류가 이성의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상호의존적 “나눔”이라는 속성의 궤도를 이탈하여 “차별” 과 “독점”으로 얼룩진 것은 불완전성과 유한성의 극복 방식의 잘못된 선택에 그 원인이 있다.

인류가 생존하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차별과 독점으로 고독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존중과 상호의존으로 고독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수많은 哲人(철인)의 고독과 사색 그리고 방황과 懷疑(회의)를 통해 완전함에 대한 본질에 해답을 찾고자했으나 결국은 모두가 실패했다. 당연히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의 본질은 불완전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오늘날도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은 “ 그 사람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라고하지, 그 사람은 너무나 인간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불완전성과 유한성으로 인한 고독과 불안 그리고 고통을 상호간에 분담하면서 나눔이 인간의 존재 이유라는 실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상호공존의 연대의 존재요, 상호 의존의 나눔의 존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상호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에게는 나눔의 의지가 유달리 필요한 존재이기에 공동체라는 사회가 만들어 졌고, 그 사회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로 발전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라는 것은 어떤 형태 등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관계는 바로 나눔이다.

오늘날에도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가진 자, 힘센 자, 배운 자의 완력과 차별 그리고 독점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는 상호공존의 나눔의 존재로 복귀를 위해 몸부림치면서 미래로 힘차게 나가고 있다.

나눔을 위한 세상은 나눔의 축복을 선(善)으로 인식하고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상호보완, 상호 의존적 관계는 인간에게 있어 절실한 숙명의 방향이다. 인간이 가야할 지향점이다.

나눔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진 자, 못가진 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잘생긴 자, 못생긴 자의 구별이 소용없다. 모두에게 적용된다. 국가라는 것도, 이웃이라는 것도, 가정이라는 것도 연인 사이라는 것도 나눔의 핵반응에 반응하는 것이다.

경제 또한 나눔이다. 부자는 자수성가해서, 남들보다 더 배워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도움이 있었기에 부자는 더 나눔으로 보답해야한다. 기업 또한 신기술을 개발하고 판매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개념은 먼 옛날의 유산이다. 기업은 사회적 가치로 ”일(노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투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 기업의 존립 이유다. 상생의 나눔이다. 우리는 나눔을 어떤 직접적인 수혜의 인식에 사로잡히지 말아야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분법적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시대변화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더 이상의 불평등을 대표하는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저자)의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구조(r>g)되어서는 결코 나눔의 공동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선진국과 달리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에 있어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나눔의 사회적 가치가 결여된 사회다. 이제 포용적 사회로 가야한다. 포용적 사회는 인간의 노동 가치를 중요시하고 일 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포용사회로의 가는 길에 있어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는 그 누구보다 장애인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장애인의 삶 자체가 그 누구보다도 “일”이 절실하고 그들에 대한 나눔이 우선되어야 한다.

“불평등과 빈공문제의 해결에 있어 정부가 소외 계층에게 적절한 소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소득을 안겨주는 ”소중한 일자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족, 국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나는 이사회에 발전에 이바지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을 다시금 상기해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노동의 동물이다. 배부른 돼지가 결코 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곳곳에서 불평등 심화, 청년실업, 날로 심해져 가는 고령화, 세대 간 갈등 등 이 모든 현안 문제를 “포용적 사회로의 나눔”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잘 생각해본다면 분명 우리는 상호의존하면서 인간의 불완전성의 두려운 실존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나눔이란 상호의존의 실천은 인간에게 더욱 “보다 인간적”인 것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고, 상호 의존의 나눔은 함께하는 공동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는 이런 인간의 본질에 한 점의 의문 없이 미래를 향해 나가가야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의 종언” 같이 이제는 차별과 편견 그리고 독선이 사라지는 날이 바로 역사의 종언이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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