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인생의 ‘장애’ 되지 않도록 후배들 멘토 되고 싶어” …제10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제과부문 금메달리스트 최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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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인생의 ‘장애’ 되지 않도록 후배들 멘토 되고 싶어” …제10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제과부문 금메달리스트 최창성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3.05.18 10:02
  • 수정 2023-05-25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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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5월 10일자 대통령 1주년 취임에 즈음해 실린 1면 사진의 주인공, 장애인 파티시에 최창성 씨다. 지난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메스에서 열린 제10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제과 부문 금메달리스트. 그가 대통령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초콜릿 공예품을 만들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우리의 만남은 이보다 열흘가량 앞서 이루어졌다. 당시 최창성 파티시에는 5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과의 오찬이 예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줄 선물을 만들어야 한다며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나비와 꽃으로 장식된 초콜릿 공예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장애인’ 아닌 ‘장인’ 최창성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계를 돌려 기능올림픽 폐회식이 열렸던 2023년 3월 25일로 돌아가 보자. 같은 날 열린 시상식 무대. 무대 위 공간 가장 가운데로 ‘CHANGSUNG CHOI(KOREA)’가 선명한 영상이 올라가자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이미 금메달인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시상식 무대에 내 이름이 올라가고, 태극기를 든 내 모습이 비치니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대회를 준비하는 기간 내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내조를 해준 아내 얼굴과 늘 뒤에서 저를 응원해준 형님도 떠오르고 지난 15년이란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왜 안 그랬을까. 사고 이후 겪었던 좌절과 재출발,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늪으로 밀어넣었던 실패…. 그 우여곡절 끝에 선 영광의 무대였으니 대성통곡을 했다고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평범했던 출근길, 음주운전 차와 정면충돌

1년6개월의 병원생활 끝에 기능장에 도전

 

최창성 파티시에의 인생을 바꾼 인생을 바꾼 사건은 15년 전 어느 출근날 아침에 일어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습니다. 갓 초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인사를 하고 출근을 했죠. 그런데 어, 하는 순간 앞에서 차 한 대가 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더라고요. 눈 깜빡할 사이였죠. 그리고는….”

음주운전 차였다. 반대 차선을 달리던 차와 정면충돌, 깨어 보니 온몸이 부서져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1년 6개월.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부서진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가장 절실한 것은 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아이가 있는 가장인데… 삶을 포기할 순 없었죠. 아무리 재활을 해도 오래 서 있기는 힘들 테니 다시 초콜릿을 만들고 케이크를 만드는 일로 돌아가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배운 도둑질’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제과기능장 시험 준비였다. “자격증이 있으면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데서 강의를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지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 내내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기능장 시험을 보러 갈 때 다리를 질질 끌고 갔죠. 그랬더니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시간을 30분인가를 더 주더라고요. 장애인 배려 차원인 거죠. 사실 시간을 더 준 거는 의미가 없었던 게 규정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과제를 완성했거든요.”

당시만 해도 하나의 시험장에 열 명 정도가 들어가 시험을 보고, 그중 합격자는 한 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제과기능장은 어려운 시험이었지만 단번에 붙어버렸다. 2010년의 일이었다. 미확인 정보지만 (당시 한국기능장협회장의 말을 빌면) 당시로서는 최창성 파티시에가 유일한 장애인 제과기능장이 아니었을까.

기능장을 따고 나니 재취업도 어렵지 않았다. 물론 눈물겨운 재활도 재취업에 한몫했다. 강남 유명 제과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매장의 총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2012년에는 월드초콜릿마스터즈대회의 한국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물론 비장애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 “월드초콜릿마스터즈 국가대표가 되니 예전의 자신감이 되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이 불편한 다리가 내 인생의 장애가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자신감을 되찾고 나니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들과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 3월 25일 열린 제10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시상식에서 최창성 선수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창업, 그러나 재난처럼 찾아온 실패

장애보다 더 깊은 좌절에서 ‘일’로 재기

 

“열정페이라고 하죠? 특히 이 업계의 노동조건은 가혹했어요. 대부분의 매장들이 자영업이다 보니 4대 보험은커녕 새벽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쉬는 날도 없이 일을 시켰어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한 매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뛰쳐나오고 하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록 나는 어렵게 이 자리에 왔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날을 잡아 가까운 후배와 제자들을 불러모아 “‘너희들 하나하나는 작은 돌에 불과하지만 힘을 모으면 큰 성이 될 수 있다. 함께 힘을 모아 일을 하나 벌여 보자’고 말했죠. 그랬더니 모두 기꺼이 힘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렇게 2015년 창업을 했다. 창업을 하면서 원칙을 정했다. 무조건 주 5일 근무를 한다. 하루 8시간 근무한다. 근무 시간 외에 일하면 수당을 준다. 당시 업계로서는 상상도 못 할 조건이었다. 제품은 인터넷 쇼핑몰에 납품했다. 달달하고 예쁜 디저트를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는 매력에 장사는 ‘잘’ 됐다. 그런데 망했다, 4년 만에.

“떠먹는 티라미수, 아시죠? 그거 우리가 처음 만든 거예요. 잘 나갔죠. 그런데 쇼핑몰 업자가 결제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폐업 신고를 하고 없어져요. 일종의 ‘먹튀’죠. 근데 얼마 후에 자기 부인이나 친인척을 내세워 다시 쇼핑몰을 열었더라고요. 그런데도 사기죄는 성립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꼬박꼬박 돈을 잘 주었거든요. 그러면서 믿음을 쌓고는 싹 ‘날라’버렸던 거죠.”

미수가 수억 원대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의 문을 닫아야 했다. 그때 아파트 담보 대출까지 받아서 직원들 퇴직금까지 챙겨주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다. 사람들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4년의 기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은 결과가 이런 실패라니…. 자존감도 무너졌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장애를 얻었을 때보다 더 힘겨운 날들이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같은 시간 속에서 최창성 씨를 끄집어낸 것은 역시 ‘일’이었다.

“20년 넘게 이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리저리 인연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기술을 알아봐 주는 분도 있었던 거죠.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카페 진루아쏘입니다.”

진루아쏘의 총괄쉐프(상무)로 취임한 최창성 쉐프는 정말 ‘일’에만 몰두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메뉴 구성도 다시 했다. 루왁커피로 유명했던 경춘가도상의 카페 진루아쏘가 디저트 명소가 된 것도 그의 기술과 열성 덕분이다. 그런 와중에 장애인기능올림픽에 나가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처음에는 장애인기능올림픽이라고 해서 살짝 얕봤습니다. 경력만 27년인 파티시에인 데다 대한민국 제과기능장인데, 아무려면 장애인들과 겨뤄 못 이기겠나 싶었던 ‘오만’이었죠.” 최창성 씨의 이런 생각은 경기 당일 경기장에서 한 방에 깨졌다. 물론 젊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함께 기술을 겨뤄야 할 사람들 대부분이 ‘직업인’이었던 것이다. 몸의 불편은 보조공학기기로 보완하고, 오랫동안 자기 분야에서 쌓아온 기술을 마음껏 펼치는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라 ‘장인’이었다고.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 기능올림픽은 22세 이하 청년들이 출전하죠. 이 친구들을 트레이닝 시켜서 내보낸단 말이에요. 그런데 장애인기능올림픽, 즉 애벌림픽은 그게 아니에요. 물론 선천적인 장애인도 있지만 저 같은 중도장애인도 있고, 만 15세 이상 등록장애인이면 누구나 출전할 수 있으니 이삼십 년씩 자기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 온 사람들이 출전합니다. 수준이 달라요.”

기능올림픽 현장에서 만난 외국의 파티시에 및 제과(Patisserie and confectionery) 부문 선수들은 겉으로 보기엔 대부분 비장애인 같았다고 한다.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이 많았고(이들은 고성능 보청기로 자신의 청각을 보완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지체장애인도 팔길이가 살짝 차이가 난다든지 해서 큰 불편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걷기는 하되 오래 서 있거나 뛰기는 힘든 다리를 지닌 채 6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자신이 가장 불편해 보였다고. 그런데 그들이 구현하는 기술은 최고 수준이었다는 게 최창성 파티시에의 후평이다.

▲ 3월 24일 열린 제10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제과 부문 경기에 몰두하고 있는 최창성 파티시에

 

2위를 압도적 점수 차로 누르고 우승

후배들에게 ‘문’ 열어주는 멘토 되고파

 

2023년 3월 24일 프랑스 메스, 애벌림픽 제과 종목 경기장. 파티시에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어이듯, 제과는 프랑스가 원조 격이다. 게다가 개최지도 프랑스이니 프랑스 선수들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리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선수 2명, 심사위원장도 프랑스인, 이런 불리함 속에서 대한민국 최창성 선수는 2위와 엄청난 점수 차이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과제가 좀 까다로웠습니다. 미니 케이크를 15~20개를 제작해야 하고 설탕 조각도 해야 했어요. 성질이 다른 초콜릿과 설탕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붙여야 해 꽤 다양한 기법을 구사해야 했죠. 제한 시간 6시간 내에 작품을 구현하는 것도 문제였죠.”

최창성 선수는 여타의 선수들과 다른 전략을 썼다. 프랑스 선수들을 비롯해 다른 나라 선수들이 전체 작품을 만들어 간 것에 비해 최 선수는 각 모듈을 구성하는 단위(케이크, 초콜릿 조각 등등)를 전반에 모두 만들어 놓고, 후반에 이것들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전반까지는 확연히 최창성 선수의 속도가 늦었다. 그런데 후반으로 가면서 작품이 전체적인 모습을 갖춰가자 프랑스인 심사위원들이 와서 “꽃잎을 왜 떼었냐?” “케이크를 어떻게 붙였냐?” 는 등의 질문을 하는 등 견제가 들어왔다.

“신경, 당연히 쓰였죠. 그런데 저는 지난해 12월 과제가 정해지자마자부터 2월까지 작품 구상을 하고 작품 구상이 완성된 다음부터는 하루에 하나씩 작품을 완성하자는 각오로 연습을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정도 견제야 큰 문제가 안 됐습니다. 만들어 놓은 요소들을 제대로 붙이기만 하면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시간 정도 남겼을 때 여기저기서 초콜릿 조각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나고, 외신 기자들이 최창성 선수 앞으로 몰렸다. 그리고 프랑스인 심사위원마저 그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우승이구나, 했던 순간이다.

장애를 입기 전 12년, 장애를 입은 후 15년. 최창성 씨의 파티시에 인생에 꼭 짚고 넘어갈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형, 최문성 파티시에다.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 최창성 씨의 형 최문성 씨도 파티시에다. 그것도 디저트 카페로 유명한 카페 노티드의 총괄 쉐프, 오늘날의 카페 노티드를 일궈냈다.

“제가 학생 때는 운동을 했어요. 태권도와 복싱이요. 근데 아시다시피 운동을 하다 그만두면 마땅히 할 일이 없어요. 운동선수들은 공부를 거의 안 시키는 게 우리나라 풍토였잖아요. 군대 갔다 와서 막막할 때 형님이 저를 제과 쪽으로 인도해 주신 거죠.”

운동선수가, 그것도 태권도, 복싱 등 격투기를 했던 사람이 곰살맞게 초콜릿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의외로 과자와 초콜릿을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파티시에의 길을 꾸준히 갈 수 있게 해 준 것도 최문성 파티시에였다. 그래서 최창성 씨에게 형은 인생의 스승이자 멘토다.

“이제 제게 남은 일은 형님이 제게 훌륭한 스승이었듯 저도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 주는 일입니다.” 최창성 씨가 밝힌 앞으로의 계획이다. 기능올림픽이 끝나고 그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담당자에게 맞춤훈련센터이든 다른 장애인 교육기관이든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나눠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에 함께 간 선수단 중에 요리 종목에 출전한 청년이 있어요. 요리를 전공하고 있는 시각장애 아이인데 성격도 밝고, 재주도 훌륭해요. 그 친구를 보며 든 생각이 아, 저런 친구들이 정말 많겠구나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장애를 가진 젊은 친구들에게 내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프랑스 기능올림픽이 끝난 뒤, 최창성 씨를 비롯해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단은 바빴다. 대회를 마친 뒤 한동안 국회며, 청와대며 대한민국 선수단의 7연패를 축하하는 저명인사들의 축하를 받으러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이제 5월 중순, 바쁜 일정이 서서히 정리되고 있어 최창성 씨는 자신의 계획을 서서히 구체화 시키려 하고 있다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리의 ‘장애’는 인생의 ‘장애’가 아닙니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문을 열어주기만 하면 우리는 ‘장애인’ 기능인이 아니라 ‘장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꽃으로 피어나리”

초콜릿과 설탕으로 그려낸 최창성의 ‘세계평화

제10회 장애인기능올림픽 제과부문 과제의 주제는 ‘세계평화’였다. 이를 주제로 “최대 6시간 안에 두 개의 모듈을 제작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라. 모듈1은 무게 35~40g의 미니 케이크 15~20개, 모듈2는 높이가 최소 80cm의 초콜릿 조각”을 만들라는 것이 과제였다.

이 과제 아래 탄생한 최창성 파티시에의 작품은 “화상을 입은 여인과 평화의 상징 비둘기를 통해 전쟁을 아픔을 딛고 세계평화를 이루자”는 뜻을 담고 있는 백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려한 조각상이다.

▲구상 단계의 작품 스케치

전체적으로 화이트를 주색으로 한 것은 평화를 상징하는 색이 백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품의 상단에 자리한 생각하는 여인의 얼굴 한쪽은 폭격으로 인한 화상을 표현했다. 전쟁으로 인한 슬픔에 잠긴 여인인 셈. 그러나 이런 아픔을 딛고 평화로 나아가면(비둘기) 아름다운 꽃(제품 하단의 디저트가 꽃을 표현한 것임)이 피어난다는 의미다. 꽃은 곧 희망이다.

이 작품을 구상하기까지 최창성 파티시에는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추상적인 ‘세계평화’를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상화하며 자신은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은 ‘전쟁의 아픔’으로도 ‘장애의 아픔’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며, “세계평화는 곧 비장애-장애를 구분하지 않는 모두의 세상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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