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타고 방방곡곡] 가비와 함께 정동길을 가다_2
상태바
[휠체어 타고 방방곡곡] 가비와 함께 정동길을 가다_2
  • 편집부
  • 승인 2023.02.09 09:08
  • 수정 2023-03-17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망국의 아픔과 항일정신이

커피향에 실려 숨쉬는 길

▲ 정동길. 구한말의 아픈 역사와 커피향을 동력 삼아 휠체어가 간다.

정동길 나들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호에 이어 두 번째 글이다. 지난번엔 고종이 즐겨 마시던 가비에 얽힌 고종의 꿈을 이야기했다. 이번 호에도 영화 ‘가비>를 통해 본 고종의 비애와 그 시대 가비가 가져온 변화를 엿본다. 우선은 지난호에 이어 영화 <가비>를 잠시 돌아보자. 영화 <가비>는 고종의 바리스타 따냐와 따냐를 사랑한 남자 일리치 그리고 망국의 통한을 제국의 수립으로 털어버리고자 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이야기다.

 

영화 <가비>, 구한말 가비로 얽힌 세 남녀 이야기

가비에 담은 고종의 꿈은 가비 향처럼 날아가고

 

▲ 영화 <가비>의 포스터. (사진출처: <가비> 공식 블로그)

고종은 따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치욕스럽다 해도 나는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만들어 황제가 될 것이라고 따냐에게 선포한다.

고종에게 마음을 연 따냐는 고종이 좋아하는 커피를 볶을 때 이렇게 말한다.

“가비를 볶을 때는 과일과 꽃향기가 섞여 나고 뜨거운 물에 우려낼 때는 은은한 향을 내면서 가비만의 고소한 향이 납니다. 가비는 검고 쓴맛이 강해서 독을 타는 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연 따냐는 고종이 좋아하는 가비를 기미해 건넨다. 어릴 적 따냐는 노비 신분이었다. 그러다 러시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성장했다. 따냐의 직업은 무기와 가비를 밀거래하는 밀거래상이다. 따냐가 일리치를 만난 날도 따냐는 기차 안에서 밀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단속하는 러시아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기 전 조선인 일리치에게 극적으로 구조된다.

따냐와 일리치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을 오가면서 무기와 가비 등 밀거래할 만한 물건을 조선이나 일본으로 반입한다. 그들은 몸은 비록 타국에 있지만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금을 만들어 독립군에게 보낸다. 일리치에게 구조된 따냐는 사랑에 빠졌고 밀거래 자금을 조선 의병에게 보내고, 산속에 숨어 의병을 돕다 러시아군에게 발각돼 총살 직전 일본군에 구출된다. 일본군은 따냐의 목숨을 담보로 일리치에게 의병 소탕을 지시한다. 둘은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일본군은 따냐에게 러시아에 밀사로 온 민영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고, 결국 따냐는 러시아공관에서 통역사로 일하게 된다. 따냐와 고종은 그렇게 만난다. 한 남자에게 가비는 사랑이고 또 다른 한 남자에게 가비는 제국의 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 손탁호텔의 커피숍

유관순 넋이 담긴 이화박물관과 망국 현장 중명전

 

정동길은 한국 최초의 카페가 있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1894년 고종에게 처음으로 커피를 대접한 손탁 여사가 새운 ‘손탁호텔’ 1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호텔 커피숍은 ‘정동구락부’에서 활동하는 정치인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정동구락부’는 친목단체인데, 내국인 회원으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이완용이 있고 외국인으로는 미국공사 실과 프랑스영사 플랑시를 비롯해 당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다이와 리젠드르,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 있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이 있던 손탁호텔의 베란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주요 회원으로 일본인들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정동구락부는 열강 세력의 성쇠 속에서 친구미파 인사와 주한 구미 외교관들의 연대를 위한 연락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다. 이들은 손탁호텔 커피숍에서 주로 만남을 가졌다. 그러니 한국의 커피 골목은 정동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손탁호텔 자리에는 이화박물관과 존슨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화박물관 안에는 유관순 열사의 빨래터도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열여섯 꽃다운 나이였던 소녀에게 나라 잃은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겠느냐고 하겠지만 10대는 10대만의 시대적 고민을 하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한다. 나도 그랬다. 나라에 큰일이 나면 그것을 걱정하는 건 나이와 상관이 없다. 게다가 어려운 시대이다 보니 지금의 청소년보다 한충 더 성숙한 생각을 했을 거란 짐작이다. 나라 걱정에 가족의 끼니와 안위도 걱정되었을 게다. 3·1운동에 앞장서며 일제에 저항의 깃발을 높이 든 유관순의 짧은 삶은 누구라도 추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손탁호텔 터에 자리한 이화박물관

정동길 나들이에서 지나치지 말고 봐야 할 곳은 ‘중명전(重明殿)’이다. 정동극장 옆 골목길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6월 지어진 황실도서관이다. 수옥헌은 지은 지 2년 만에 화재로 소실되고, 그 터에 1902년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조 건물이 새로 지어졌는데, 바로 지금의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1904년 11월 17일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채 이토 히로부미가 주재한 어전회의가 중명전에서 열렸고, 경운궁 주위에 일본군을 배치한 이토는 내각대신 8명에게 개별적으로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11월 18일 새벽 1시, 8명의 대신 중 5명이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 다섯 명, 이른바 을사오적은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망국의 현장으로 기록된 ‘도서관’ 중명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현장이 재현되어 있어 그 시절 아픔과 분노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 중명전에 재현된 을사늑약 체결 현장. 정동극장을 끼고 난 작은 길 한켠에서 만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도 정동길엔 짙은 커피향이 흐르고

커피 2, 프림 2, 설탕 3의 달달한 추억도

 

정동길은 그런 길이다. 백 년 전 숱한 아픔을 품고 있는 저항의 길이기도 하고 가비의 문화를 처음 전파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동길 카페에서는 유난히 가비의 향이 짙다. 가비향에 이끌려 카페 루소로 들어선다. 카페 루소는 캐나다대사관 바로 옆 정동빌딩에 있다. 정동빌딩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유니버설디자인으로 지어진 착한 빌딩이다. 카페 루소에는 가비를 볶는 냄새가 가득하다. 그 향에 끌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진다.

▲ 캐나다대사관 옆 정동빌딩에 있는 카페 루소.(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울어디’)

가비향에 이끌리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가비의 향기에 홀린 듯이 끌려가서인지 가비는 ‘악마의 음료’라고 불린다. 향에 유혹당해 가비를 마셔 보면 극과 극을 오가서 그런 별칭이 붙여졌을까. 쓴맛을 즐기는 사람은 가비의 진한 맛을 선호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쓰디쓴 가비가 사약같이 느껴진다.

가비가 흔하지 않았던 7080세대에게는 일명 다방커피가 최고다. 다방커피는 커피와 프림, 설탕의 비율이 아주 중요하다. 최고의 비율은 이렇다. 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이렇게 커피를 믹스하면 맛도 기가 막힌 다방커피가 만들어진다. 예전엔 집이든 사무실이든 손님이 오면 예쁜 커피잔에 가비를 달달하게 타서 내오는 것이 에티켓처럼 여겨졌다. 나도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달달한 가비 맛이 훨씬 좋다. 요즘은 커피 전문점에서는 아메리카노에 달달한 도넛과 쿠키를 곁들어 먹는 것을 선호하지만….

정동길 여행에서 맛보는 가비에는 영화 <가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달달함과 사약 같은 역사의 쓴맛이 공존한다.

 

 

 


무장애 여행 정보

[가는 길].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지하철역과 정동길이 1번 출구과 2번 출구 사이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먹을거리]

-유림면: 50년 전통의 노포, 서울 3대 메밀집으로 유명하지만 냄비국수도 일품이다.(전화 02-755-0659, 서울 중구 서소문로 139-1)

-덕수정: 역시 5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이다. 부대찌개와 오징어볶음 맛집으로 소문난 곳. 가성비가 좋다.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은 점심 장사만 하고 일요일은 쉰다.(전화 755-0180, 서울 중구 정동길 41)

-자연주의 카페 ‘루쏘(Lusso)’ 정동점: 캐나다대사관 바로 옆에 있다. 커피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브런치 메뉴도 굿! (전화 02-772-9935, 서울 중구 정동길17)

 

[접근 가능한 화장실]

시청역과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층,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수도원 성당, 정동빌딩 1층 등에 장애인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