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지적장애인 강간죄, 장애 정도와 상관없이 적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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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지적장애인 강간죄, 장애 정도와 상관없이 적용 가능”
  • 차미경 기자
  • 승인 2022.11.23 09:42
  • 수정 2022-11-23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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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정도’이 아니라 사건 당시의 조건 전반 살펴야…
지적장애인 성폭행 사건은 ‘무죄’ 선고…가해자가 피해자 상태 인식 못 했을 수 있어
서울행정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적장애 강간 피해자가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가해자에게 ‘장애인 준강간죄’를 물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장애인 준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81)씨의 상고심에서 원심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18년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피해자 B(48·지적장애 3급)씨를 이듬해 2월 한 달 동안 다섯 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범행 때마다 "우리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는 말로 B씨를 집에 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A씨에게 적용된 죄명은 성폭력처벌법 6조 4항의 장애인 준강간이다.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저지른 성폭행을 처벌하는 규정이다. 장애인 대상 강간죄는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 기본 형량이어서 일반 형법상 강간죄(3년 이상의 유기징역)보다 처벌이 무겁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 등을 고려해 형량을 정했다.

반면 2심은 무죄로 판단했다. 사건 당시 B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이유에서다. 2심 재판부는 정신적인 장애가 ‘오랫동안 일상·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장애’를 의미한다고 전제한 뒤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지적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가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점과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 50∼70으로 교육을 통한 재활이 가능하다는 점, ‘싫어하는 것’에 적극적인 거부 표현을 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두 사람이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는 등 친분이나 호감도 있었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2심의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에서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음’이라 함은 장애 그 자체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장애가 주 원인이 돼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곤란한 상태에 이른 경우를 포함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의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와 주변 상황·환경, 가해자의 행위 방식, 피해자의 인식·반응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기준도 재확인했다. ‘장애의 정도’만이 아니라 사건 당시의 조건 전반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피해자 B씨의 상황에 관해서도 한글·숫자 개념이 부족하고 대인관계와 의사소통 능력이 특히 낮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은 A씨의 무죄라는 원심 결론은 그대로 유지했다. 1년 전부터 피해자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용돈을 주거나 먹을 것을 사주는 등 호의적 관계를 유지해왔던 A씨가 B씨의 항거불능 혹은 항거곤란 상태를 인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성폭력처벌법상 정신적인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장애’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차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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