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은혜에게 캐리커처는 사람을 만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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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은혜에게 캐리커처는 사람을 만나는 일”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2.06.23 13:40
  • 수정 2022-06-24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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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굴'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장안의 화제가 된 사람이 있다.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다. 양평 문호리리버마켓에서 ‘니얼굴’이란 간판을 걸고 무려 4천 명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 캐리커처 작가, 그리고 오는 6월 23일 개봉된 영화 <니얼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도 그랬지만 실제로 그녀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에너지로 둘레를 밝게 빛나게 해주는 ‘아티스트 정은혜’와는 양평의 작업실이나 북한강가 문호리리버마켓에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일약 ‘인싸’가 된 데다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니얼굴>의 개봉을 앞둔 터라 정은혜 작가는 스케줄이 줄줄이 사탕인 유명인이 되어버린 터라 북촌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커피 향기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카페에서의 인터뷰에는 정은혜 작가의 만화가 엄마 장차현실 작가와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함께 했다.(이 글에서 기자는 상황에 따라 정은혜 작가, 은혜 씨 등 다양한 호칭을 섞어 쓸 것을 미리 밝힌다.)

이 세 사람은 요즘 마치 한몸처럼 움직인다. 왼쪽부터 아버지 서동일 감독, 엄마 장차현실작가 그리고 정은혜 작가. 

그림은 “유전자의 힘”
사랑이 넘치는 모녀의 티키타카


정은혜 작가를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사람 얼굴을 주로 그리는 이유는 뭔가?” 거창한 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나는 사람을 그릴 때 제일 편안해요.”


그가 그린 캐리커처는 예쁘지 않다. 아무리 예쁜 사람이라도 예쁘지 않게 그리는 작가로 유명한 그는 사람을 그릴 때 “머리, 얼굴 다. 옷 다” 본다. “모두 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관적으로 보고 그린다. 그런데 아주 색다른 그림이 탄생한다. 그것이 정은혜의 화가로서의 능력이다.  


은혜 씨는 엄마가 화가이자 만화가이지만 따로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만의 화풍을 갖고 있는 작가다. 그가 이렇게 성장하는 데 영향을 준 사람이 있을 듯싶어, 누가 도와주냐고 묻자 도움을 준 사람은 없고, 그저 “유전자의 힘”일 뿐이란다. 


이야기 도중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정은혜 작가는 얼른 ‘아아’를 집어 들었다. 오전에 이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으니 다른 것을 마시라고 하는 데도 기어이 아아를 집는 그녀를 보고 “너무 많이 마시면 배 아플 텐데…” 하며 기자가 걱정을 하자 엄마 장차현실 씨가 “그러니까”라고 맞창구를 쳤다. 은혜 씨는 “뭐가 그러니까야!”라며 엄마에게 살짝 투덜댔다. 그러자 하하 웃는 엄마 장차현실 씨. 영화 <니얼굴>이나 그네들 가족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또리네 집』에서 익히 본 모녀의 티키타카다. 투정을 부리는 딸의 표정에도, 웃음으로 받는 엄마의 표정에도 모두 사랑이 가득하다. 삼십몇 년을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온 모녀의 서로에 대한 신뢰는 이런 작은 데에서도 진하게 드러난다. 


정은혜 작가는 2019년부터 채색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대상이 사람에서 개와 고양이 등 주변의 동물로도 넓어졌다. 어렵지는 않았다. 사람을 그리는 것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반려견 ‘지로’와 같은 동물들을 그리는 것이나 은혜 작가에게는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특히 4,000명의 얼굴을 그리면서 두텁고 단단해진 드로잉의 힘이 채색 작업에서도 그대로 살아나 빛이 났다. 은혜 작가의 채색 작품의 강점은 살아있는 듯 강렬한 색감이다. 캐리커처 작품에서 드러나는 명쾌한 선과 대상의 특징들이 강렬하면서도 담담한 색을 입고 또 다른 생명력을 보여준다. 


물감 작업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는 다시 “편해요”라고 짧은 답을 돌려주었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잇단 몇 가지의 질문에 정은혜 작가는 모두 “괜찮아요” “쉬워요” “편해요” 식의 짧지만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 작가 정은혜의 힘이다. 얼마 전 은혜 작가가 일하는 양평 발달장애 창작 스튜디오 ‘틈’에 몇 명의 여성 화가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냐며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자 은혜 작가는 이렇게 답을 했다. “너무 잘하려고 안 하고 그냥 하면 돼요.” 마치 선배가 조언을 하듯. 욕심을 내지 않으면 만사가 어렵지 않다는 진리를 그녀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그림에도,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의 연기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났다.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지극히 매력적인 그림과 연기 말이다. 

문호리리버마켓에서의 모녀. 

 

20대 중반 처절한 고립 경험도
그림 그리기로 자신의 존재 증명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방영 이후 은혜 씨의 생활은 확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러저러한 매체들로부터 인터뷰가 쇄도했다. 기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고 하는 일이 싫지 않다. 인터넷 검색 창에 자신의 이름을 치면 기사들이 주르륵 뜨는 것이 재밌기도 하다. “낮에 인터뷰하고 들어가면 밤에 잠도 안 자고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검색해 봐요.” 엄마의 귀띔이다. 다행히 기사들이나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이나 모두 좋은 것들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 은혜 씨를 사랑스럽다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20대 중반 은혜 씨가 겪었던 고립과 좌절을 되돌아보면 정말 천지가 개벽할 변화다. 


<니얼굴> 영화의 첫 장면은 은혜 씨가 자신의 방에서 뜨개질을 하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다. 발도르프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와 발달장애인을 위한 대학인 호산나대학에서 공부도 했지만 막상 학교를 나오니 갈 데가 없었다. 그리고 나간다 해도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에 상처를 입었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뜨개질이나 하고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대화를 하던 시절, 은혜 씨네 가정은 우울의 그림자가 가실 날이 없었다. 


당시 양평에 어린이들을 위한 화실을 운영하던 엄마 장차현실 씨는 그런 은혜를 더 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화실에 ‘취직’을 시켰다. 청소도 하고, 아이들 그림 그릴 준비도 해주는 보조인으로. 그런데 어느 날엔가, 아이들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은혜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여성지에서 외국 모델의 얼굴이 나온 향수 광고를 찢어 주면서 ‘그려봐’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은혜 씨와 은혜 씨 가족에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계기였다. 


옆에 누가 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면서 그려낸 그림에서 만화가이자 화가이기도 한 엄마는 놀라운 재능을 발견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선과 선들. 그렇게 은혜 씨는 그림을 만났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은혜 씨가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는 것. 그림이 또 다른 감옥이 된 것 같았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화실에 들어가는데 어두컴컴한 화실 한구석에서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은혜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근데 여명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구부정한 은혜의 등이 너무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저건 아니지 싶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생각해 낸 것이 캐리커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 마침 집에서 산 하나 넘어가면 국내에서 가장 큰 플리마켓인 문호리리버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문호리리버마켓은 아무나 셀러가 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엄청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 드디어 셀러가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8월 중순. 불볕 태양 아래 선풍기 하나 없는 천막 밑은 찜통 그대로였다. 


안 가고 싶지 않았냐는 질문에 정은혜 작가는 “아니지요”라며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왜 안 가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터지고 여기저기 땀띠가 솟아도 은혜 작가는 매주 꼬박꼬박 마켓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일 년 만에 1000여 명의 얼굴을 그리고, 은혜 씨는 자신만의 밝고 유쾌한 모습을 되찾았다. 비가 와서 손님이 없는 날이나 장사를 마치고 난 시간, 다른 셀러들과 어울려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은혜 씨의 모습은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했다. 엄마가 없어도 “예쁘게 그려주세요” 하는 손님들의 주문에 “원래 예쁜데요, 뭘~” 하고 웃을 수 있는 ‘니얼굴’의 작가 정은혜가 거기 있었다.

 

은혜 작가가 그린 캐리커처, 작품에 찍은 낙관은 어마 장차현실 씨가 만들어준 것이다. 
은혜 작가의 채색 작품. 자화상이다. 

 

 

 

 

 

 

 

 

 

 

담담하게 일상의 자리 지키기
8월 23~30일 인사동에서 개인전


드라마 방영 이후 크게 달라진 또 하나는 길에서, 카페에서 배우 정은혜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같이 사진 찍어 주세요’ 하는 사람도, 사인을 해 달라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런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묻자 배우 정은혜는 “아뇨. 괜찮아요” 한다. “그럼 좋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역시 “괜찮아요”다. 엄마가 덧붙인다. “좋아서 팔짝팔짝 뛸 것 같은데, 안 그러더라고요. 은혜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게 평소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 저희가 신기할 정도예요.”


지금 엄마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원래의 은혜의 자리’, 그림을 그리고 양평에서 동료들을 만나는 일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은혜가 의연하다는 것이다. 영화 개봉을 앞둔 시점이라 당장은 인터뷰나 행사 등 여러 스케줄들이 은혜 씨를 압박하고 있지만 잘 대처하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그림을 그리는 게 먼저라는 그녀는 오늘도 작업 도구를 싸 들고 나왔다. 요즘 그림 그릴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틈나는 대로 밀려 있는 캐리커처를 그릴 작정이다. 


8월에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다. 제목은 ‘포옹’전(展), 8월 23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한다. 그런데 요즘 바빠서 전시회 준비를 미처 마치지 못했다. 전시회 이야기가 나오자 정은혜 작가는 “빨리 하자”며 눈을 반짝였다. 채색 작품 10점 정도와 연필화가 걸릴 것 같지만 얼른 스케줄 조정하고 전시회 준비를 할 작정이다. 주제가 ‘포옹’이 된 것은 은혜 씨가 유난히 포옹을 많이 하고, 그런 사진이 워낙에 많기 때문이다. 문호리리버마켓을 찾아온 손님들과도, 작업실을 방문한 사람들과도 포옹을 많이 하는 정은혜 작가. 그는 사람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사람으로 하여 치유를 받은 사람이다. 그 따듯함을 8월 전시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밀린 얼굴을 다 그리고 8월 전시회도 끝나면 은혜 작가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기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사람, 동물 말고 그려보고 싶은 것이 없냐는 질문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은혜 작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답을 내놨다. 계절이 변화하는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는 것. 봄에 피는 꽃, 여름의 강, 가을의 숲, 겨울의 설경 등 은혜 씨네 가족이 사는 양평 일대의 풍광이 그녀의 화폭에서 어떻게 거듭날지 자못 기대가 크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은혜 작가에게 물었다. 배우나 화가 중 딱 하나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하겠냐고.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 둘 다 하겠노라고. 그럼에도 ‘정은혜는 00이다’, 그리고 ‘정은혜에게 그림은 00이다’를 채워보라는 요구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정은혜는 니얼굴 캐리커처 작가다. 그리고 정은혜에게 캐리커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영화 소개] 

위풍당당 은혜 씨, 그녀의 특별한 일상 '니얼굴'

 

감독: 서동일
출연: 정은혜, 장차현실, 김미경
장르: 다큐멘터리
러닝타임: 86분
관람등급: 전체 관람 가
개봉일: 2022년 6월 23일

 매달 셋째 주 주말이면 경기도 양평 문호리 북한강변을 따라 1km나 되는 플리마켓이 열린다. 문호리리버마켓. 2016년 여름 이곳에 특별한 셀러가 나타났다. 다운증후군 외모를 한 은혜 씨, 그녀는 ‘니얼굴’이란 간판을 걸고 “예쁘게 그려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손님에게 “원래 예쁜데요, 뭘~” 하며 예쁘지 않은 캐리커처를 그려준다. 그렇게 2년 반 만에 그녀가 그린 얼굴은 무려 2000여 명. 이 영화는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은혜 씨가 ‘니얼굴’ 캐리커처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을 통해 첫선을 보인 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일정에 맞춰 개봉을 늦춰 6월 23일 개봉한다. 그 사이 제18회 서울환경영화제, 미국의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인 2021신라인페스트, 제12회 광주여성영화제 등에도 초청되어 호평을 받았다. 


 정은혜 작가의 아버지이기도 한 서동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위풍당당한 매력의 정은혜를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서 감독은 현재 발달장애인 예술가 5명의 직업 분투기 <예술도 노동이다>를 내년 상반기 완성을 목표로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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