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그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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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그리는 이야기
  • 편집부
  • 승인 2022.04.21 10:01
  • 수정 2022-04-2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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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대리/소셜벤처 (주)닷

내 꿈은 구두 디자이너였다. 화려한 옷과 메이크업, 액세서리까지, 코디의 완성은 구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이 애니메이션 속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를 그릴 때 난 구두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TV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구두를 그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상상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직은 어린 나이 16살, 나는 어두운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내가 보고, 그리던 세상은 아름다운 색색의 색깔도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모양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이 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오직 빛과 어둠뿐이었다. 빛이 보이면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구나’ 그 빛이 사라지면 ‘오늘 하루도 지나갔구나...’라고 생각하며 매일 메일을 보냈다.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그 날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빛은 새로운 아침을 가져다주었고, 나 역시도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 인생 제2막은 특수학교에서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할아버지의 반대, 부모님과 동생의 걱정 속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나는 특수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는데 실명의 원인이나 시력의 정도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애인에 대한 교육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다. 학교에 적응하면서 보지 않고 세상을 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점자와 스크린리더 및 흰지팡이의 사용 방법 등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점자를 처음 봤을 땐 신기하기도 했지만, 걱정되기도 했다. 제3의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으니까. 점형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억은 4점 니은은 1~4점, 심지어 노래도 있었다. 문제는 촉각을 통해 점을 글자로 인식하는 것이었는데 한글이 모아 쓰기인 반면 점자는 풀어 쓰기 형식이라서 글자로 읽기에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고 생각했다.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잘 적응하는 날 보면서 기특하기도 했으니까. 환경이 변하면 좋아하는 것도 바뀌게 된다. 그러나 난 아직도 좋아하는 게 있는데 바로 비 내리는 날이다. 세상을 볼 수 있을 땐 빗방울이 하늘에서 땅으로 스며드는, 그리고 나뭇잎에 맺혀 있는 빗방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빗방울이 우리의 곁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의 향기가 좋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걸을 때면 우산 속에서 들려 오는 빗방울들의 ‘토독 토독’ 속삭이는 소리가 좋았는데 지금은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빗소리로 인해 가려진 주변의 소리들. 내가 피하지 못하는 길 곳곳에 자리한 물웅덩이들. 약속이 있는 비 내리는 날이면 또다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배우는 하나하나가 너무 좋았고, 소박한 꿈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친척처럼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먼 것 같은 이런 관계이다. 명절 때가 되면 생각도 많아지고, 마음속 두 아이가 다툼을 시작한다. 과거 사촌들과 놀던 추억이 떠오르지만, 이제는 그렇게 놀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마음속 한 아이는 시력을 잃은 날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 같이 하던 사촌들을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속 다른 아이는 불편한 자리와 부담스러운 어른들의 말씀들이 생각나 명절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노처녀나 백수들이 명절을 꺼려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한 아이를 구석으로 밀어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있더라도 난 아침이면 출근 준비에 분주하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주말에 있을 데이트에 설레하고, 친구들과 새로운 맛집 탐방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런 일상. 아마도 몇 년 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그늘이 생기면 서늘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안내견 파트너인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의 만남도 좋았지만, 안내견을 볼 수 있어 더 기대되었던 것 같다. 친구와는 며칠 전, 광고에서 보았던 피자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처음에 길을 좀 헤맸지만 안내견 덕분인지 친절한 분을 만나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들어간 입구에서 직원은 “개는 안 됩니다.”라며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친구는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듯 직원에게 설명했다. “개가 아니고 시각장애인 안내견인데요. 식당에도 들어가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중한 친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직원의 대답은 “아! 네~! 안 돼요.”였다. 안내견은 전문 훈련을 받아 누군가를 헤치지도 않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테이블 밑에서 얌전히 기다려 줄 텐데…. 어떤 사람의 입장을 더 고민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병원 갈 준비를 하고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병원에 방문하여 진료받는데 결국 난 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의사는 내가 환자로 왔어도 함께 온 활동보조 선생님을 보며, 아픈 증상이나 현재 복용 중인 약, 알레르기 등 나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간호사는 다음 병원 방문 일정을 “보호자만 오셔 보세요.”라고 하며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상의했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시력이 없어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갔을 뿐 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내 몸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나이이다. 하지만 가끔 아니 종종 사람들은 나를 어린아이나 지능이 없는 사람 등으로 대하는 것 같을 때가 있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방법을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속상할 때도 있지만, 하루하루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살아가고 있다. 내일의 내가 더 예쁜 구두를 고를 수 있도록 나름대로의 매뉴얼을 만들어 가면서 말이다. 매일매일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날을 위해, 예쁜 구두를 신은 난 오늘도 길을 나선다. 멋진 꿈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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