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애인 부부의 신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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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애인 부부의 신혼여행
  • 편집부
  • 승인 2010.01.14 00:00
  • 수정 2013-02-04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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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떠난 첫 여행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마음먹은 데로 쉽게 여행을 떠나기 어렵다. 여행지의 편의시설의 열악함은 물론 활동보조인 등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 일 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아내와 함께 떠난 박정혁 씨의 신혼여행 이야기를 통해 어느 장애인 부부의 여행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자료제공=한국장애인재단 잡지 ‘세상을 여는 틈’>

글/사진 박정혁
 

때 지난 신혼여행


 지난 여름 아내와 함께 정동진에 다녀왔다. 때 지난 신혼여행이었다. 처음엔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아내와 함께 떠나는 첫 여행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아내 생일을 맞아 정동진에 가려 한다는 내 말을 들은 한 친구가 “그럼 신혼여행이네? 결혼식날 신혼여행 못 갔잖아!” 하는 바람에 졸지에 신혼여행이 되었다. 아내와 결혼한 지 5년도 넘었지만 신혼여행은 커녕 변변한 여행이라고는 해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한 것과 활동보조인 문제가 가장 컸다.


 드디어 아내의 생일을 맞아 정동진 여행을 결심했다. 우리 부부가 굳이 정동진을 택한 이유는 그동안 수도 없이 기차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이다. 무척 낭만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우리 부부 단 둘이 먼 거리까지 놀러가고 싶었다. 이제까지는 먼 거리의 기차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부부 모두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는데다 손도 잘 못 쓰기에 먼 거리를 가려면 동행해줄 활동보조인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고 우리 부부의 활동보조인들이 동행해주기로 했다.


 두 분 모두 우리 부부가 시설을 나와 처음 지역사회에서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었다. 그 동안은 각자 다른 곳에서 활동하다 최근에 우리 부부의 활동보조인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각각 월 180시간씩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을 뿐이어서 하루 6시간밖에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정동진에 다녀오려면 하루 종일 활동보조를 받아야 하기에 그분들과 쌓아온 유대관계가 없었다면 이번 여행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로서는 그분들에게 하루 6시간 이상의 시급을 채워줄 능력이 없기 때문인데, 다행히도 이에 대해 그분들이 양해를 해주었다.

놓쳐 버린 기차


 7월 13일 밤 9시45분 발 기차였다. 아내의 생일 축하기념으로 동묘앞역 근처에서 옛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러 동묘앞역으로 갔다. 이곳에서 지하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청량리역 지상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5분을 굴러가야 하는 거리였다. 승강장에서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느려터진 휠체어리프트를 아내와 차례로 타고 역 밖으로 나왔다. 전동휠체어의 속도를 최고로 올리고 부리나케 달렸지만 청량리역의 낡고 초라한 시설이 또 전동휠체어를 멈추게 했다. 전동휠체어가 들어가려는 역 입구엔 사고가 잦다는 수직형 휠체어리프트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날 예약한 기차는 놓치고 할 수 없이 1시간 뒤의 막차로 표를 바꿨다. 휴가철이라선지 역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드디어 기차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역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곳에는 신형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10시47분발 무궁화호, 그 열차 3호차의 문이 열리고 차체 안 계단 상단에 숨겨진 경사로가 내려왔다. 2단으로 된 이 경사로는 폭이 좁아서 올라갈 때 자칫 운전을 잘못하면 추락하기 십상이다. 옆에 안전봉이 없기 때문이다. 역에서 우연히 만난 동해행 승객까지 모두 석대의 전동휠체어가 3호차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열차 내부는 좌석들이 좌우 가장자리 두석씩 가운데 통로를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휠체어 석은 양쪽 뒷자리 두석씩을 뺀 자리였는데, 전동휠체어 석대가 타다 보니 약간은 좁았지만 넉대까지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드디어 열차는 특유의 괴성을 지르며 정동진으로 출발했다. 6시간 넘게 걸리는 정동진 가는 길이다.

아내는 이미 바다로


 열차 안은 피서객들로 북적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탔는데 모두들 들뜬 분위기였다. 좌석이 모자라 서서 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체면 불구하고 신문지나 가방을 깔고 앉거나 아예 바닥에 누워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장실 문제가 걱정이었는데, 열차 내의 화장실이 전동휠체어로는 들어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폭이 좁아서였다. 그나마 소변이 마렵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낭패일 뻔했다. 한참 동안 앞자리에 앉은 전동휠체어 이용자와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밤 12시가 지나자 모두들 전동휠체어 등받이에 기대고 잠을 청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아내도 많이 피곤한지 곧 잠들었고 나도 이내 잠들었다. 활동보조인 이모님과 서서방은 휠체어석 앞에 보호자석이 있어서 입석을 끊었어도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도착지에 다가가면 갈수록 밤은 점점 깊어 갔다.


 열차는 5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다. 드디어 정동진이다. 아직 해뜨기 직전이었다. 도중에 내리던 빗줄기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멎어 있었고, 상쾌한 정동진의 바람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홍금보와 참았던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아내가 없어졌다. 아내는 이미 바닷가에 가 있었다. 정동진역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열차 창문으로 바다가 보였다.


 해수욕장도 가까워서 전동휠체어로 5분만 굴러가면 백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동휠체어는 백사장을 못 달린다. 바퀴가 모래에 푹푹 빠지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타고 백사장을 달릴 수 있는 해수욕장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해돋이를 보려 했던 것이었으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내가 먼저 가 있는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바다와 맞닿은 모래사장에는 못 들어가지만 그 외각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길은 달릴 수 있었는데 모래사장과 나란히 맞닿아 있어서 바다를 보는 데는 별 문제 없었다.

정동진의 일출 앞에서


 캄캄한 어둠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처음엔 해돋이 보기는 틀렸다 여겼다. 그곳에서는 원래 1년 중 2/3는 해돋이를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정동진이 해돋이로 유명한 이유는 아마도 희소가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들 실망하고 돌 모서리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사방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수평선 넘어 구름 사이로 한줄기 별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엔 주홍빛 조그만 점이 구름 사이로 빼꼼 비추다가, 주홍빛 조그만 점이 점점 커지며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유명한 정동진의 일출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휠체어에 장착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기 바빴다. 어느새 해는 500원짜리 동전만큼 커져서 구름을 거둬내고 있었다. 사람이 자연 앞에 경건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새삼 실감했다. 정동진의 장관이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날 우리 부부는 정동진의 일출을 함께 바라보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갖가지 시련과 역경을 같이 겪어온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추억들이었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그녀와 함께 산지 벌써 5년째다. 살아오면서 사랑을 함께 나누며 서로 다투고 화내기도 하며 소소한 행복에 가슴 벅차했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들이었다. 장애인부부로서 지역사회에 정착해 살면서 아직은 우리들이 살기엔 힘든 삶의 연속이지만 떠오르는 정동진의 일출처럼 희망을 항상 가슴에 품고 전진하는 삶이었으면, 시련이 닥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삶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여는 틈에서는 비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인 여행, 혼자살기(자립생활), 결혼, 연애, 외출 등이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에게는 사회적 편견이나 장애물 때문에 감격적인 첫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장애인재단 잡지 '세상을 여는 틈'의「나의 첫」코너는 장애인의 이러한 첫 경험을 실어 장애인에게는 용기와 자극을 주고,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종전의 장애인 기사나 수기에서 다루는 ‘역경 극복 스토리’나 ‘동정적’ 시선은 지양하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불편한 모습과 이에 당당히 맞서 살아가는 적극적인 장애인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장애인재단 잡지 ‘세상을 여는 틈’ (kfdi@naver.com)으로 원고와 용량이 큰 사진 두 장 이상, 간단한 자기소개 등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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