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디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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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디나 언제나
  • 편집부
  • 승인 2021.09.24 09:54
  • 수정 2021-09-24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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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법무법인 ‘한남’ 변호사

 

나는 14살 무렵 갑작스레 생긴 종양으로 척수신경이 손상되어 두 다리의 감각과 운동능력을 모두 잃어버렸고, 벌써 햇수로 30년 가까이 휠체어가 나의 두 다리를 대신해 주고 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앞으로 두 다리로 걸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충격은 강렬했던 만큼이나 빠르게 희미해졌다.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천방지축으로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던 일상에서 집 앞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갈 때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변화와, 이 단순한 사실이 주는 독립성과 자존감의 상실이었다.

특히 등하교가 문제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 대부분의 학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1층으로 교실 배정을 해달라는 부모님의 부탁을, 학교는 거절했다. 고학년 학생들이 1층에 배정되면 시끄러운 환경에 노출되어 공부에 지장을 받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야속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대신 학교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혜택(?)을 제공했는데, 바로 ‘이재근 이동전담조’를 만든 것이다. 이 전담조는 4명으로 구성됐고, 나의 등하교 때마다 4명이 휠체어의 앞뒤 좌우를 잡아 번쩍 들어서는 나를 1층에서 3층까지, 또 3층에서 1층까지 날아가듯 이동시켰다. 대신 방과후 청소를 면제받는 나름 그 또래의 학생들에게는 달콤한 보상을 받았다.

나는 4명의 손에 들린 채 1층과 3층 사이를 날아다니며 중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쳤고, 나의 친구들은 청소면제라는 혜택을 얻었으며, 학교는 다른 학생들이 조용한 환경에서 수업을 들을 권리(?)를 지켜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행복한 나름의 묘안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당시를 돌이켜보면 아무렇지 않은 듯 때로는 그 모든 일들이 즐거운 듯 행동하며 고마운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아가던 그 순간에도, 내 안에 도움을 받는다는 부채감과 4명의 손에 번쩍 들려 계단을 날아가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선들에 대한 공포와 모멸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등하교 할 때를 빼고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점심시간 1층 매점에 내려가 떡볶이를 먹자는, 기꺼이 나를 들겠다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 나는 그런 시선들을 제법 덤덤하게 대하지만 마음 한켠에 불편한 마음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음식점, 카페, 편의점에 가기 위해 계단과 턱을 넘어야 한다면 굳이 가지 않으려 하나, 애석하게도 내가 가야 하는 곳의 대부분이 아직도 계단 위에, 턱 너머에 있다.

현행 ‘장애인등편의법’은 편의점, 식당 등 소규모 근린생활시설에 대하여 300제곱미터(약 90평) 이상이라는 면적 기준을 두고 면적이 그 이하일 경우 장애인편의시설 설치의 의무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인해 결국 전국 체인화 편의점 4만3975개(2019년 국가통계포털 자료) 가운데 300제곱미터 이상의 바닥면적을 가지고 있는 830개 편의점만이 장애인의 이용이 가능한 상황이며, 전국 음식료품 10만7505개 중에서도 바닥면적 기준에 따라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가지고 있는 소매점은 2,391개에 불과하다. 비율로 따지면 1-2% 남짓인 셈이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현행법상 편의시설 설치의무에서 면제되는 기준을 기존 300제곱미터에서 50제곱미터로 하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러나 국내 생활편의시설 대부분이 소규모 매장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정된 기준에 따르더라도 장애인이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극히 일부에 그칠 것이다. 이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금번 입법예고를 통해 편의시설 설치의무의 면제 범위를 광범위하게 인정한 것은 유감이다. 덕분에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빈번히 또 쉽게 출입하는 카페, 편의점 등에 대하여 휠체어 사용자는 방문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아니면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시는 서너 분의 손에 몸을 맡긴 채 힘겹게 계단과 턱을 오르내려야 한다. 고마운 일이나, 그와 같은 경험은 이번 세대에서 마무리되었으면 한다. 모든 카페에, 편의점에 고민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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