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위해 노력한 삶 아닌, 매 순간 최선 다한 삶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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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위해 노력한 삶 아닌, 매 순간 최선 다한 삶이었어요”
  • 차미경 기자
  • 승인 2021.03.05 17:59
  • 수정 2022-01-2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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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영 / 국제사회복지사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던 지난 2월 23일 작은 카페에서 김해영 씨를 만났다. 그녀는 날씨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만큼 따뜻함과 유쾌한 에너지를 지닌 모습이었다. 134cm의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작고 여려 보였지만 그녀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그 누구보다 넓고 단단했다.

가난과 폭력, 그리고 장애라는 현실을 단 한 번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해 왔다고 말하는 그녀의 단단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애와 폭력, 가사도우미의 삶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을 원했던 집안에 장녀로 태어났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그녀를 방바닥에 내던졌고, 척추를 다친 그녀의 키는 134cm에서 멈췄다.

매일 술을 입에 달고 살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폭언과 폭력을 멈추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을 심하게 앓다가 그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는 힘든 삶에 대한 원망을 그녀에게 돌렸고, 그녀는 매일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폭언을 넘어서 흉기를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어머니 밑에서 폭력과 폭언을 고스란히 받으며 성장했다.

“제 유년시절 기억 중 제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두 개 있어요. 그중 하나가 초등학교 1년 입학식 날인데, 입학식을 혼자 갔는데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를 빙 둘러서서는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면 한마디씩 했던 모습이에요. 제 작은 체구를 보고 사람들이 “너 여기 왜 왔니? 넌 아직 여기 오면 안 돼. 너무 작다. 다시 집에 갔다가 좀 더 크고 오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하는데, 그때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 학생이 맞다.”며, 저를 데리고 가셨었거든요. 어쩌면 그때가 삶에서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나를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대하는지’를 경험했던 날이었던 것 같아요. 아주 공포스럽고 불안했으며, 거절당한다는 기분이 너무 크게 다가왔거든요. 그리고 내가 장애를 갖고 있구나를 새삼 인식했던 계기였어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고모님이 저를 불러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아버지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네 몸을 그렇게 만들긴 했어도, 그래도 너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라”며, 제가 어떻게 장애를 갖게 됐는지를 이야기 해 주셨죠.”

기자는 여기까지 듣고, 그녀가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됐는데도 보듬어 주지 않았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이 더 커졌으리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모님의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잘못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저를 한순간 너무 편하게 해줬어요. 부모님의 폭언과 폭력에 항상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그런가’ 스스로를 자책해 왔는데, 내 잘못이 아니라는 답을 얻고 나니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폭언과 폭력을 피하기 위해 주인집 아주머니가 소개해 주신 한의원에서 6~7개월 간 가사도우미로 살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원망하고 슬퍼하기보단 좋은 점을 찾고,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사실 한의원에서 생활은 제게 좋은 기억이에요. 할아버지 두 분과 함께 생활했는데, 삼시 세끼 항상 곰국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고(웃음), 또 두 분이 저를 너무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거든요. 또 그때 한의원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한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식모살이를 하며 독학으로 천자문을 익히게 됐어요. 그리고 그 덕에 ‘사서오경’을 접하면서 제 인생이 변화를 맞이했던 것 같아요.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길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을 진짜 잘못이라 일컫느니라’라는 부분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 나는 장애를 가졌고, 가난해. 그런데 그게 왜? 내가 바꿔나가면 되지”라는 생각이 제 삶을 지금의 모습으로 이끌게 된 거죠.”

 

세계가 알아주는 직물장인,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떠나다

1980년 직업학교 훈련생일 때의 김해영 복지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1980년 직업학교 훈련생일 때의 김해영 복지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했던 그녀는 한의원을 나와 직업전문학교로 눈을 돌린다. 편물기술을 익힌 그녀는 국내외 각종 기능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만 19세에는 철탑산업훈장도 받았으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1985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직물 부문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1987년도에는 일본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직물장인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고, 충분히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녀는 돌연 아프리카 보츠와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24살의 저는 제대를 앞둔 남자친구도 있었고, 어머니의 병도 어느 정도 안정을 취했었으며, 대학 입시에는 떨어졌지만 원한다면 전문대학도, 또다시 일본으로 갈 수도 있는 너무나 안정적인 상태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뜩 과로로 인해 몸져누운 적이 있는데, 그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운명처럼 예전에 봤던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던 것이 기억이 났고 바로 이듬해 2월 스물다섯의 나이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목공과 양재, 편물 등 총 3개 반으로 나뉘어 있던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김해영 씨는 4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편물반을 맡았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지만 손짓과 발짓은 물론 한국어까지 섞어가며,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그녀는 한국에서는 몰랐던 다양한 것들을 느끼며, 스스로 자존감이 올라가고 행복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제가 그곳에서 들은 말 중에 살면서 처음 들었던 말이기도 한 것이 바로 ‘당신 예뻐요’라는 말이었어요. 한국에서 제 이름 앞에 붙는 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버지 없는, 키 작은 등 사회적 낙인들이 붙었다면, 이곳에서 저는 그냥 김해영 그 자체였고, 또 여자였어요. 한 번도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로서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보츠와나에 생활하면서 그런 낙인과 시선에서 벗어나며 편안함을 느꼈고, 장애가 보였음에도 그냥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제 주체성과 자존감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힘이 저를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한 원동력이었고요.

1990년 보츠와나 초기 한국인 청년봉사자들과 함께
1990년 보츠와나 초기 한국인 청년봉사자들과 함께

평온했던 보츠와나의 생활이 이어가던 중 1994년 학교에 위기가 닥쳤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교사들이 하나둘 떠나갔고 결국 그녀 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녀 역시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쌌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3명의 학생이 그녀를 찾아왔고, 자신들에게 계속 편물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말했다. 학생들 손에는 음식재료가 담긴 봉투가 들려있었다. 자신들이 음식도 하고 다 할 테니 수업만 계속해 달라는 간절함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직업학교의 교장이 됐다.

그해 가을 학교는 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2003년까지 보츠와나 학생들과 함께했다. “그 시기에 정말 많은 걸 이뤄냈어요. 보츠와나 내에 직업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직물기능시험제도를 만들었으며, 기술을 보급하는 역할까지 이루어냈어요. 보츠와나에서는 ‘직물’ 하면 김해영 찾아가 봐, 할 정도로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어요. 그 시간이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든 거름이 된 거죠.”

 

지금까지의 삶은 오픈게임

지금부터가 인생의 ‘본게임’

 

김해영 씨의 삶은 한 마디로 ‘도전의 연속’이다. 14년간 보츠와나에서 약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그녀는 조금씩 타성에 젖었다고 회상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일을 진행해 왔는데, 어느 순간 ‘내 선택이 맞았나?’라는 의문이 들게 됐어요. 지금껏 직감으로 자신감으로 일을 진행해 왔는데, 저를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렇게 그녀는 다시 마흔이 다된 나이에 뉴욕으로 날아가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던 그녀는 뉴욕에서도 7년 만에 미국 최고 명문인 컬럼비아대에서 석사까지 마치는 결과물을 낳았다.

“공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던 게 제 지난 14년의 세월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다시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용기와 목표가 생기더라고요.”

김해영 씨는 대학 졸업 후 또다시 한국이 아닌 케냐를 택했다. 그곳에서 아프리카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장애인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해 활동을 이어갔다.

그랬던 그녀가 2018년 9월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 역시 보다 더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학업 과정이 끝나면 그녀는 다시 케냐로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가 부산에 가려고 계획을 한 뒤 비행기를 탔는데, 도착해 보니 부산이 아니라 김해인 거에요. 그럼 저는 부산에 대한 생각은 그 순간 지우는 편이에요. 김해에서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거죠. 어차피 가지 못할 부산에 대해 속을 끓이는 것보다 김해에서 볼 것, 먹을 것, 할 일을 찾는 게 현명한 거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전 비장애인의 삶을 살지 못해요. 키도 다시 커질 수 없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죠. 그런데 제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김해영은 키 134cm에 장애를 가진 여자예요. 그래? 알았어, 그럼 이제 뭘 할까?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2017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케냐 어린이들과 함께
2017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케냐 어린이들과 함께

그녀는 지금까지의 삶을 ‘오픈게임’이라고 비유하며, 앞으로의 펼쳐질 삶에 대해 ‘본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하루하루가 더 기대되고 설레인다고 했다.

‘손등이 있으면 손바닥’이 있듯 누군가는 그녀에게 봉사의 삶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었다면, 분명 그만큼 자신도 받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어쩌면 살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해영 씨와 인터뷰하는 내내 기자는 ‘긍정’이라는 단어는 아마 그녀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제부터 본 게임에 들어가는 그녀의 첫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차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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