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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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TV
  • 편집부
  • 승인 2021.02.19 09:23
  • 수정 2021-02-19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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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 / 한빛맹학교 교사

 

시각장애인들 중에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쉴 새 없이 상황이 변하는 다른 스포츠들과는 달리 정지 상황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에 전체 상황을 이해하고 파악하기에 용이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무리들 중 하나였는데 다양한 형태로 계산되는 수많은 숫자 기록들은 수학 좋아하는 나에겐 야구를 좋아하게 만든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였다.

맹학교 기숙사는 저녁식사 시간이 끝나는 동시에 자습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 우리에게 그 신호는 프로야구 중계가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서 영어책, 수학책을 펼쳐 놓고 있긴 했지만 그건 혹시나 하는 감시의 눈길에 대한 방어기제였고 내 온 신경이 집중하고 있는 곳은 귓속의 이어폰에서 나오는 라디오 중계였다. TV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일반적으로 더 유명한 캐스터나 인기 있는 해설자는 TV 중계를 맡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선택은 라디오였다. 그건 라디오가 더 숨기기 편해서도 아니었고 TV보다 조작하기 편해서도 아니었다. 가격이 저렴한 것도 휴대가 편한 것도 가장 큰 이유는 못 되었다.

라디오 안에서는 우리도 야구장을 볼 수 있었다. 하늘 색깔이나 잔디의 상태 같은 전체적인 풍경도 관중들이 응원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아주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동작이나 전광판에 쓰여 있는 작은 숫자들도 그 안에서 만큼은 환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보다 시력이 좋지 않은 시각장애인이었지만 그 속에서만큼은 전혀 장애를 느끼지 못했다.

중계를 하는 해설자와 캐스터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어 줄 모든 사람들이 야구장의 현재 상태와 관련한 아무런 시각 자극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상황을 묘사하고 중계를 이어갔다. ‘보이는 라디오’ 같은 것은 없던 때였기 때문에 그분들은 모든 청취자들에게 눈이 되어주기 위해 작은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공이 굴러가는 위치도 그것이 닿아 있는 바닥의 모양도 선수가 취하고 있는 특이한 자세들도 라디오 안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그들의 눈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해 주려는 강력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기 위해 말의 속도도 적지 않게 빨랐는데 그건 오히려 경기관람의 박진감을 높여주는 효과로 작용했다. 그것은 최고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중계가 되었다.

그러나 TV 화면 속의 중계진들에게 그런 배려는 찾아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자의적인 판단 속에 세상 모든 시청자들은 선명한 화면을 멀쩡한 두 눈으로 공유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 가득한 착각이 있었다.

공이 날아가고 있는 괴적은 굳이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다들 보고 있지 않냐는 생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순간 말을 멈춘다. 볼카운트는 화면 속에 계속 표시되고 있는 것이고 선수들의 기록들도 그러하기 때문에 전부 줄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술적인 설명 몇 마디 덧붙이고 화면과는 관련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 이야기해 주는 것이 전문가의 몫이라고 강한 믿음을 갖는다. 적어도 대다수에게는 그것이 더 세련되고 깔끔한 중계일 수도 있겠다.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시간과 높이만큼 길게 “호오오오오오옴런!”이라고 말하는 건 촌스럽거나 과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들이 마주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다.

세상에는 라디오 해설자 같은 분도 있고, TV 캐스터 같은 분들도 있다. 나 같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길을 함께 가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의 눈에 비친 세상을 설명하고 함께 음식을 먹더라도 내 입장에서 겪게 될 불편함에 대해 미리 인지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꼭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친절한 라디오 같은 존재이다.

반면 TV 해설자 같은 분들은 배려도 도움도 스스로의 생각과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쪽으로 가서 파란 지붕이 있는 건물에서 노란 불빛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내가 얻은 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다.

낯선 식당에서 2시 방향에 있는 입에 맞는 반찬을 발견하고 반복적으로 먹는 내게 아무도 모르게 반찬의 위치를 바꿔주는 호의를 베풀어 준다면 그 또한 내겐 친절이 아니다. 시각적 단서를 열심히 활용해 길을 설명하는 것도 슬쩍 반찬을 상대방의 앞으로 옮겨주는 것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겐 매너 넘치는 행동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를 도우려고 내 입장에서 고민한 흔적은 없다.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싶다면 그의 입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확신하는 최선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만 멋진 일일 수 있다. 때로는 나의 호의도 불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겐 아이의 마음으로 어르신들에게 어르신의 마음으로 내가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다가가는 라디오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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