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희망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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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희망고문
  • 안승준 /시각장애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04 09:27
  • 수정 2020-12-04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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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답지 않은 농담 주고받는 재미로 만나던 친구들은 언제부터인가 서로에게 희망 섞인 덕담을 건네느라 바쁘다. “너도 얼른 장가가야지. 눈만 조금 낮추면 너만 한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술 조금만 줄여, 넌 원래 건강체질이라 운동 조금만 하고 그러면 금방 건강해질 거야!” “너 정도 청약점수면 어디든 분양 당첨 가능이야.”

당장 무언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듣는 녀석이나 말하는 친구나 희망 섞인 말들은 서로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오래전 의사선생님도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나에게 그런 마음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수술의 충격이 크면 사흘 정도 시력이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한 달 있다가 다시 진료해 보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루가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시력 상태의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린이에게 의사선생님은 급기야 “5년만 지나면 의학이 발달해서 어떻게든 볼 수 있을 거야.”라는 마지막 소견을 남기셨다.

웬만해서는 긍정적인 예후를 말하지 않는다는 의사 선생님마저도 아직 두 눈 초롱초롱한 어린이에게 ‘시각장애’를 선고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하고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분이 생각한 시각장애는 교회에서 말하는 지옥불이나 법정에서의 사형선고처럼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선한 의도는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친구들의 덕담과는 많이 다른 효과를 내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 길게는 처음 몇 달, 더 길게는 몇 년 정도는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견디고 참아내는 데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답답했지만 끝이 있다기에 괜찮았고 힘들었지만 나아지고 있다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된 명확한 현실은 그동안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의사선생님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꺠닫게 해 주었다. 몇 년간의 치료도 그동안 세워두었던 계획들도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좋은 마음으로 건넨 몇 마디 말들이 오히려 나의 학년기를 늦추고 몇 년의 허송세월을 흘려보내는 결과가 되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좀 더 일찍 장애를 알고 인정할 수 있었다면 난 좀 더 빠르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조금 더 시간을 절약했을 것이다. 희망을 주는 것은 좋지만 내게 주어졌던 그것은 방향이 많이 틀려 있었다.

장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모양의 적응을 목표로 가진다. 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글씨들을 부여잡고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을까를 생각할 시간에 얼른 점자 공부를 해야 했다. 내게 맞는 치료방법이 있을까 돌아다닐 시간에 지팡이를 짚고 보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방법을 훈련해야 했다. 난 막혀버린 가던 길이 다시 열리기를 멍하니 기다리기보다 다른 길로 가는 법을 얼른 훈련해야 했다.

내 친구는 눈만 조금 낮추면 정말 장가갈 수 있고 또 다른 내 친구는 지금처럼만 노력하면 머지않아 집을 장만할 수 있겠지만 내 시력은 노력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은 희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희망을 가져야 하는 달라진 모습이기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좋은 말 건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너도 곧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야.”라는 멘트를 날리곤 한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 덕담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그건 남성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이에게 “너도 노력하면 금방 여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의학 수준에서는 그렇다. 그런 이들에겐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조언보다는 남성으로서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희망을 건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정확히 알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덕담을 건넬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얼른 점자도 배우고 재활훈련도 하자!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거야. 다르게 사는 게 생각보다 많이 나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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