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라는 개념은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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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라는 개념은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아”
  • 배재민 기자
  • 승인 2020.11.05 18:28
  • 수정 2020-11-05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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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걸 시각장애 시인

올해 인천작가회의의 지회장으로 초대된 손병걸 시인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각장애인이다. 특공대에서 복무했을 만큼 건장했던 시인은 베체트병으로 인해 시각을 잃었다. 시각을 잃기 전에도 그는 동호회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지만, 정식 등단은 시각을 잃고 나서다. 그는 시에 대해 “시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장르라서 재미있다. 시는 깊고, 다양하며 상상력을 부른다. 시를 쓸 때, 행간과 행간 사이, 내가 쓰려고 하지 않고 참아도 나의 이야기들이 스민다. 이런 시의 특징들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자기 비애 ⟶ 반성 ⟶ 발견 ⟶ 변화라는 단계를 거쳐서 지금에 다다랐다고 증언했다. “시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를 썼다. 자기 분노를 하소연하는 방식이 시의 중심이었다. 나는 아프다, 나 어떡해, 세상은 왜 힘든가, 이러한 주제들이다. 이는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 찡찡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얘기만 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 볼 수 있는 여력이 없던 것이다.”

이후 시인은 다시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반성이 똬리를 틀었다. 시인은 “세상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있지만 나도 세상에 잘못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반성을 했다.”고 덤덤히 회고했다.

시인의 내부에서만 맴돌던 언어가 세상을 향했을 때 시인은 시라는 장르에 정의가 없고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시에 ‘발견’이라는 요소를 도입했다. “당시 나는 기계적으로 시에는 정답이 있다고 알았다. 하지만 시는 사지선다의 답으로 정의할 수 없다. 시는 기존의 사전적 해석을, 답이 나온 명사를 새롭게 정의하는 상상력으로 쓰인다. 세상에 존재하나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사물이나 에피소드들을 새롭게 끄집어내는 발견이다.”

 

시각이 감각 전부라는

믿음에 다른 감각이 죽는다

 

발견은 시각성이 내포된 단어다. 발견의 ‘견’이 한자로 볼 견(見)으로 쓴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도드라진다. 손병걸 시인은 이런 기자의 생각을 듣고 ‘반시각 패권주의’라고 꼬집었다.

그는 “발견이라는 단어는 시각적인 단어일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만 세상을 지각한다고 생각한다. 감각하는 방식에서 시각이 90%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고 말하며 “하지만 그로 인해 시각이 다라고 믿는 것, 그 믿음으로 인해 다른 감각들이 죽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손병걸 시인은 이어 ‘보다’라는 동사와 쓰임새 그리고 우리의 감각이 가진 성질에 대해 묘사하며 우리가 얼마나 시각 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다. “‘보다’라는 서술어 때문에 단어가 시각 의존적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다른 감각들도 시각만큼이나 명쾌하다. ‘보다’라는 동사의 쓰임새를 연구하면 만져‘보다’, 냄새는 맡아‘보다’, 감각은 느껴‘보다’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도 본디 우리가 볼 수 없고 실체가 없음에도 들여다‘보다’라고 표현한다. ‘보다’는 시각적인 감각 형식의 표현이지 시각이 100% 우리의 감각을 장악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인은 개념이 한가지로 국한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상은 답이 있는 명사로 정해져 있지 않다.” 시인의 말은 결국 세상이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학습된 편견이 있음을 시사한다. “장애를 예로 들어보자. 대부분은 장애는 불편하다고 규정한다. 시각장애의 경우 ‘답답하다’ 이런 것이 다 규정이다. 시각장애인은 어떤 식으로든 보지 못하는 존재이며, 삶을 사는 데 불편함만 있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대다수에게 시각은 ‘본다’라는 의미고 시각장애는 사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에 대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시다.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사전적으로는 시각장애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시로 써 내려가 사회의 편견과 마주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의 어둠에도

빛처럼 환한 환희 깃들어 있어…

 

손병걸 시인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점점 시각화되어가는 우리 세상에 뼈있는 일침을 가한다. 시인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를 집필하며 시각이 패권화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살짝 귀띔했다. 그리고 시인은 덧붙여 시각이 패권화된 사회는 단지 장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라고 말했다.

 

“내가 쓴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라는 시집은 미디어를 필두로 시각이 주가 된 영상시대를 사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미디어는 엄청 빠른 속력으로 정보를 전달하는데 이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다. 우리는 정보를 캐치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 정보 속엔 디테일이 없다. 이는 시각화된 이미지들로 인해 우리의 다른 감각들이 사장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각 외의 나머지 감각들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감각이 아닌 세상의 소외자들을 바라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시인의 시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규정한 개념들을 반전하고 해체한 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늘 마주하는 어둠에도 빛처럼 환희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어둡다, 환하다. 이는 이원논리다. 일반적으로 환하다는 환희, 어둡다는 음침함, 서글픔으로 규정한다. 나는 어둠만큼 선명한 게 있을까 하고 새롭게 메시지를 던진다. 나의 시 중에 ‘묵화를 그리며’가 있다. 묵화는 하얀 백지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어둠이 그림의 실체다. 먹이 찍히기 전 하얀 여백은 그림이 아니다. 먹물을 찍어 여백을 지워나갈 때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빛만이 존재에 대한 환희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검은색이 흰색과 같이 있으므로 존재에 대한 환희가 형상화됨을 묵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새로운 발견이며 메시지다.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장애와 예술

굳이 카테고리 나눌 필요 없어

 

손병걸 시인이 ‘반시각 패권주의’를 설명할 때 “이는 단지 장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라고 말했다. 기자가 읽은 그의 시집도, 단순 시각장애인의 시를 벗어나 현재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까지 시가 뻗어져 나감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장애를 벗어나 소외자들 소수자들을 끌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시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가장 도드라지는 사실 하나로 그의 장애성을 시에 투영해 해석하고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평론, 비평은 2차 텍스트다. 이는 다른 창작의 영역이다. 해석은 읽은 이의 자유이자 권리다. 해석이 옳든 그르든 나의 영역이 아니다.”고 평했다. 하지만 시인은 1차원적으로 시와 자신의 장애를 결부해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상상하고 해석하시라고 말한다. 나는 시를 쓰는데 나의 장애를 규정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의식하지 않는 걸 기계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시인의 답변에 기자는 예전부터 품고 있던 오랜 생각을 물어봤다. 예술 앞에 ‘장애’라는 단어가 붙는 것에 대한 장애인 예술가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장애인 예술가들이 만드는 작품의 개성은 다양하다. ‘인상주의’, ‘입체주의’, ‘바로크 시대 예술’ ‘원주민 예술’처럼 공통된 특징을 찾아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조금 웃기긴 하다. 아무도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지고 장애 예술이라 말하진 않는다. 작품의 대상이 장애인일 때와 직접 창작하는 사람이 장애인일 때를 구분하는 것이 웃기다. 굳이 카테고리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베토벤, 고흐, 세종대왕 다 장애가 있었다. 장애인들이 모인 단체를 만들기 위해 붙인 건가?”

장애인들이 모인 예술 단체를 만들기 위해 앞에 ‘장애 예술’이라고 불러도, 가끔은 의도치 않아도 비장애인들의 예술과 장애인의 예술을 구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은 이에 대해 “계보를 만드는 것, 벽이 있다는 것, 이런 문제는 벽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된다.”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저마다 현재 서 있는

곳이 우리 삶의 궁극

 

인터뷰 말미, 기자는 손병걸 시인에게 이 인터뷰를 읽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한마디를 요청했다. 시인은 곰곰이 고민하다 “저마다 현재 서 있는 곳이 우리 삶의 궁극이다.”라고 짧게 답하며 자신의 시집 ‘통증을 켜다’에 수록된 시, ‘완전한 아침’을 소개하며 설명했다.

 

“1차원은 선이다. 2차원은 면. 이들은 점점 이어지며 원이 된다. 둥근 지구 또한 그렇다. 둥근 지구 위에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서 있다. 지구는 도니 해는 매일 뜬다. 그러니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사는 삶은 완전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다. 그래서 어떤 지점에 우리가 있든 위축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끝없이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능멸할 수도 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완전한 아침은 온다. 매번.” 

배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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