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사람 - “장애를 제외한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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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사람 - “장애를 제외한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
  • 차미경 기자
  • 승인 2019.08.27 18:35
  • 수정 2019-08-27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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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씨/시각중증, 혜광학교 학생
 
평범한 삶에 찾아온 어둠
 
김미정 씨는 현재는 혜광학교 소속 학생이지만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삶을 살았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36살이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눈이 침침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안경은 불편하고 렌즈도 꺼려지던 차에 교직원 할인을 해준다는 라식수술에 관심이 가서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그때 처음 제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2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은 너무 생소한 질병이었고 병을 늦추기 위해, 낫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냐는 그녀의 질문에 의사는 뭔가를 덜 하려고 더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다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집에 오자마자 포털 사이트에 병명을 검색해 봤는데, 당시에는 용어도 제각각이고, 국내에는 관련 자료도 부족하더라고요. 그렇게 혼자 공부하고 찾아보는 일을 반복했지만 결국, 이 병을 낫게 할 방법은 없구나라는 결과에 도달했어요. 그때부터 조금 생각을 바꿨던 것 같아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서 방법을 찾자라고 생각했죠.”
 
 이후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같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며, 조금씩 힘을 얻었던 김미정 씨는 지금의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을 위한 협회인 ‘한국RP협회’를 처음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익숙해지지 않던 어둠의 길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처음 진단받았을 때의 일과 그 후의 일상까지 너무 씩씩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김미정 씨였지만 그녀 역시 지금에 오기까지 수없이 고비를 넘겼다고 이야기했다.
 
 “망막색소변성증이 진행성 질환이다 보니 충격이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불현듯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제까지 되던 것들이 안 되고 얼마 전까지 보였던 것들이 안 보였을 때 찾아오는 공포가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한번은 직장 동료들과 노래방을 갔었는데,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노래방 책자를 넘기며 곡을 찾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글자가 보이지 않았어요.
 
또 어느 날은 머리핀을 한참을 고르다가 같은 디자인으로 두 개씩 짝을 맞춰서 구입해 왔는데, 집에 와서 다시 확인하니 죄다 짝짝이었던 적도 있고…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일주일씩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하루하루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생활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고 지금처럼 다시 새로운 인생을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가족들의 도움이 가장 컸다.
 
 “제가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땐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고, 그 뒤에도 굳이 아이들에게 제 병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어요. 특히, 이 병이 유전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중 큰 아이가 고등학생일 때였는데, 학부모 총회가 있다고 해서 학교에 들렀다가 아이 친구 어머님이 하는 가게에 들러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집에 가지 않고 자꾸 밖에서 서성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 먼저 가라’라고 말을 해도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계속 서 있기에 저도 마음이 불편해서 대화를 마치고 같이 집으로 향했죠. 그때 제가 아이한테, 아니 왜 그러고 있었냐고 물어 보니까 아이가 저한테 조심스럽게 “엄마 밤 되면 잘 안 보이잖아”라고 말하는 거예요.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저한테 표현만 안 했을 뿐….”
 
 여기까지 이야기한 김미정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가족들의 배려와 사랑으로 그녀는 희망의 빛을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선생님에서 학생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다
 
 진단을 받은 후에도 15년 가까이 교직생활을 이어갔던 김미정 씨는 2016년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짐이 느껴지자, 교직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라는 생각에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28년 동안 함께했던 교단에서 내려올 때쯤 시야도 급속도로 좁아졌다고 이야기했기에 그녀가 퇴직 이후 조금은 우울한 생활을 했을 것이란 기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6개월 후인 2018년 혜광학교에 입학하며, 제2의 삶을 이어갔다.
 
 “진짜 인연이란 게 운명이 있나 봐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상담만 받아보려고 학교에 전화를 했는데, 때마침 그때가 혜광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전화로 설명 듣는 것보다 와서 직접 들어보라는 권유로 학교에 왔다가 혜광오케스트라에 대해 알게 됐고,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순식간에 입학신청서까지 작성하고 집에 돌아왔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대학교 때부터 첼로를 연주했던 김미정 씨는 취직 후에도 교사들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에 몸담으며, 꾸준히 연주활동을 해왔었다고 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며 조금씩 멀리하게 됐고, 이후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면서 집 한 켠에 세워두고 다시는 다시 잡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그 첼로를 혜광학교에 들어오면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첼로를 다시 잡았을 때 든 생각이 오랫동안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구처럼 살아오던 네가 내가 눈이 안 보이게 되니 이제야 네 역할을 하게 되는구나라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나 역시 내가 안 보이지만 안 보이게 됨으로써 그동안 쓰지 않았던 다른 능력과 생각들이 또 다른 빛을 발할 수도 있겠다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금은 그나마 눈앞에 어떤 형태가 있다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정말 어둠만 남을 것을 잘 알고 있는 김미정 씨는 ‘장애가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는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거잖아요.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면, 장애를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제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선택을 저는 제가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선택해 나갈 거예요. 혜광학교에 들어온 것도 다시 첼로를 시작한 것도 그 선택 중 하나죠. 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장애가 찾아온 모든 분들에게도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슬퍼하지 말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서 행복을 찾으라고요. 결국 모든 것은 제 선택에 달렸어요.”
 
차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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