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수용소 1
icon 수용소
icon 2021-01-13 19:24:25  |   icon 조회: 1089
첨부파일 : -
1982.4.13. 조선일보



팟쇼독재산물 북괴의 '독재지구'

김일성의 나치식 수용소군도



불충등 반체재는 "멸족" .... 출산금지
풀잎 나무껍질 연명, 둘이상 못다녀

4-6중 철조망에 전류 .... 지뢰밭 함정 파놓고 개 데리고 순찰



악질로 몰리면 "마음대로 가라"
밀림에 풀어놓고 유격대 칼-몽둥이질 연습




김일성 집단이 사상범에게 가하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인권유린의 현장인 사상범집단수용소의 전모와 참혹한 실태가 최근 뉴욕 타임즈 지의 소개로 세계에 폭로되었다. 김일성이 집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온 숙청사실이나 70년대에 이르러 권력세습제 구축과정에서 드러난 인권유린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뉴욕 타임즈의 보도를 계기로 최근 월남귀순자와 국내 북한관계 전문가들이 밝힌 '북한판 수용소열도'의 구체적 잔혹행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북한은 휴전 이후부터 산간벽지에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대단위 집단수용소구역을 만들기 시작하여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특별독재대상구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관리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김일성 부자에 반대하고 당에 불충하다고 생각되거나 김정일 후계옹립에 불만을 품은 자, 월남 인사 가족, 북송 교포 등 자유세계생활을 체험한 자로서 체재에 불만을 가진 반대세력 등 그들이 말하는 '반당-반혁명분자' '종파분자'와 그 가족 들을 강제 수용하여 이들을 굶주림과 고된 노동,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고 끝내는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사상범수용소는 58년 12월부터 2년간 주민들의 사상성분을 검토한 '중앙당집중지도사업' 때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자들을 투옥 처형 또는 산간오지로 강제추방한 데 이어 66년 4월부터 3년간에 걸쳐 '주민재등록사업'을 벌여 북한 전주민을 핵심계층(28%) 동요계층(45%) 적대계층(27%) 등 3계층 51개 부류로 구분하고 적대계층 중에서도 더욱 '위해하다고 지목되는 자'들을 특정지역에 집단수용함으로써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73년 이후 감정일 후계체재를 구축하기 위해 실시된 '당원증 및 공민증 갱신사업'에서 위해분자와 반대세력이 대폭적으로 증가됨에 따라 여러 곳에 시설을 확장, '특별독재대상구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위해분자들을 일반 범법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다루기에는 '교화소'(그들의 교도소)의 수용능력에서나 효과면에서 곤란하며, 교화소가 늘어날 경우 대외적으로 인권탄압의 인상을 받을 것이 우려된 데다가 정적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는 방법으로 가장 적당한 것이 수용소라는 판단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소련 접경지역인 온성군 창평리 풍천리 동포리 등 약 2백50평방 km에 자리잡은 온성사상범 집단수용소를 비롯한 이들 8개 수용소는 행정구역에서 제외되어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독립지역이며 규모는 대체로 1개 군단위 행정구역의 2-3분의 1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국가정치보위부 지도원으로 근무하다 79년 7월 귀순한 강형순 씨는 12일 "76년부터 2년간 김일성 정치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때 교원 김용구로부터 1개도에 2개 이상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교육과정중의 참고자료 속에 정치범수용소의 위치와 생활상이 소개돼 있다"고 밝혔다. 강 씨는 정치보위부 지도원의 임무가 각종 반당 및 종파분자를 색출하고 격리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함북 온성에서 국가정치보위부 정보원으로 일하다 82년 1월 귀순한 김용준 씨도 "온성지역의 집단수용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온성군에 있는 용남중학교에 재학중이던 62년 5월 중순으로, 당시 마을 친구와 함께 밧줄을 만드는 피나무 껍질을 구하려고 산에 올라 갔다가 '통제구역' '출입금지' 등의 표지와 철책선을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마을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반당-반혁명분자를 수용하는 집단수용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78년 9월 온성군 일대에 소위 '새땅찾기' 작업에 동원돼 이지역을 답사하다가 먼 발치서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밝히고 "이때 10여명의 남자와 3,4명의 여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머리는 한결같이 짧았으며 옷은 너무 기운 곳이 많은 누더기여서 보기에도 흉칙했다"고 말했다.


수용소구역은 3-4m 높이의 4-6중의 철조망이 설치되고 전기철조망 지뢰밭 함정을 설치해 놓았으며 기관총으로 무장한 감시병과 개를 데리고 있는 순찰병이 경계하고 있으며 만약 탈주하려다 발각되면 무처별 사살된다.

"수용소의 경계선 철책은 휴전선의 함정, 장애물보다 더 철저하며 함정 밑에는 극독물을 바른 침을 설치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탈주중 체포되거나 수용후 계속 반당 언동을 한다하여 악질분자로 몰린 사람은 밤에 트럭으로 깊은 산림지역으로 연행해서 플어놓고 "너희들은 이제 자유다. 마음대로 가라"고 해놓고는 특수부대 요원들을 시켜 칼과 몽둥이로 살해하는 훈련용으로 쓰기도 한다는 것(귀순용사 김용준 씨 증언).


사상범수용소의 모든 업무는 국가정치보위부가 관장, 통제하고 있으며 사상범의 색출이송은 사회안전부 산하 인민경비대가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 주민의 경우 읍 및 노동지구담당 정치보위부 지도원이 주민 5명당 1명의 '방조자'(정보제공자)를 앞세워 빈틈 없이 감시, 반당-반혁명언동을 한 사람을 군 정치보위부에 연행하며, 여기서는 범죄사실을 확인한 후 재판 절차 없이 '비준'(서류심사)을 하고 밤12-1시 사이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로 태워간다.


이송 때는 주로 그들이 '풍차'라고 부르는 커버를 씌워 화물차에 싣고 가거나 수용소까지 부설된 기차를 이용하며, 입은 것외에는 세면도구도 가져갈수 없고 재산은 몰수 당한다.


일단 수용되면 상상을 초월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어서야 풀려난다는 것이다. 공민증을 뺏기고 선거권은 물론 교육을 받을 권리가 박탈되며 양곡 의류 배급과 주택배당, 의료 보건 등 일체의 혜택이 없어지고 결혼도, 출산도 금지된 상황에서 모든 살아가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진다.


식사 도구 삽 곡괭이 등 기본 농사기구와 군에서 쓰다 폐품이 된 담요 등 침구를 주는 외에는 일체 편의를 주지 않아 새로 들어온 사람은 먼저 와 있는 사람들로부터 감자 옥수수씨를 나누어 받아 자신이 먹을 농사를 짓게 되는데 식량이 절대부족하여 봄에는 풀잎과 나무껍질로 연명, 해동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폐결핵 등 질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시신을 가족에게 내주거나 장사지내는 일은 없다.
수용소관리요원이 치워버리지만 매장을 하는지 다른 어떤 처리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수용소에는 처형장도 있어 탈주기도자들은 공개처형해 버리기도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4평 정도의 '귀틀집'이나 토굴을 파서 살고 있고,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통나무 집단주택에 합숙을 하도록 하고 겨울난방은 각자가 작업시간 외에 나뭇가지를 모아 해결하고 있으나 의복이 제대로 없어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수용소는 자수한 공작원 신영만 씨의 경우처럼 "공작원이 배신할 경우 가족들이 이렇게 된다"고 위협용으로 가끔 보여주는데 신씨는 "그곳의 사람들은 오직 생존본능만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체면도 없이 먹을 걸 달라고 손을 벌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석탄등 광물 캐기와 벌목 개간 등 무보수 강제노역에 새벽 4시부터 매일 12시간 이상 혹사당한다. 밤 8시까지 작업을 마치면 밥먹고 9시부터 11시까지 자기 비판을 위주로 한 사상개조학습을 받아야 하며 작업 및 학습시간외에는 2명 이상 모여 다니지 못하게 통제되고 정보원을 수용자로 위장잠입시켜 감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수용소외에도 9개도와 평양특별시 및 3개 직할시에 1-3개소씩 모두 25개소의 교화소에도 사상범을 일부 수용하고 있고, 위해분자 또는 불순발언자를 정신병자로 몰아 1-2개군에 1개 정도씩 있는 '49호 보양소'에 격리시키기도 한다.


귀순자들은 또 "68년 남파됐던 124군부대는 청와대습격기도가 실패한 후 그 책임을 물어 부대 전체가 한 금광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됐는데 이들이 무기를 탈취, 폭동을 일으켜 군대가 동원돼 겨우 진압됐다"고 전하고 "이들중 주동자는 총살당하고 너머지는 사상범수용소에 보내졌다"고 밝혔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2년에 한번 정도 김일성 체재에 도전하는 크고 작은 반체재운동(동맹사건)이 일어나는데 특히 72년부터 김정일 세습체재 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동맹사건이 더욱 늘어나 앞으로 수용소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북한관계전문가는 "10만 5천명의 수용자 숫자는 집단수용소에 있는 최소한의 것이며 확인되지 않는 더 많은 정치범이 구속돼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히고 "최근 김부자의 세습제 구축과 관련하여 소위 '위해분자'가 늘어나고 있어 수용자는 증가 추세에 있다"고 말했다.










金日成, 『3代에 걸쳐 씨를 말려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관리소는 수십 km2의 지역에 산재한 일련의 수용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수는 일정치 않지만, 대체로 북부지방 산악지대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관리소 하나에 5000명 내지 5만 명 가량이 수용되어 있고, 북한 전체에는 15만~20만 명 가량의 정치범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곳에는 정치범으로 단정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 3代도 수용되어 평생을 가혹한 환경 속에서 광산이나 벌목, 농산품 가공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관리소는 보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장한 경비병이 경계를 하고 있다. 관리소 안에는 정치범이나 그 가족 단위로 수용하는 울타리로 폐쇄된 마을이 있다. 또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사는 완전통제구역과 나중에 석방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용되는 혁명화구역이 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완전통제구역에서는 특혜받은 사람만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제18 및 제17 관리소에서 예외적으로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관리소에서도 외부와의 서신교환을 금지하고 있다.



관리소의 특이한 제도 한 가지는 연좌제다. 이 제도는 1972년 金日成이 『분파주의자나 敵은 누구를 막론하고 3代에 걸쳐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선언한 데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함경북도의 제11호 관리소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표어를 나무판에 새겨 관리소 경비본부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국가보위부 보위원이었던 윤대일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관리소에 수용된 사람은 적게 잡아도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수용된 사람들이 체포, 기소, 재판 등 정식 사법절차를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변호할 방법이 없다. 이들은 그저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 자백을 하라는 강요를 받은 다음 관리소로 이송되고 있다. 그들의 가족 역시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관리소로 이송된다.



사람들은 형편없는 식량과 생활조건 속에서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한다. 배급식량은 겨우 기아를 면할 정도다. 그래서 이들은 수용소內 동물, 식물, 나무 껍질, 쥐, 뱀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먹지 않을 수 없다.

관리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광산에서 석탄·철·금 같은 것을 채굴하기도 하고, 근처 산에서 나무를 자르기도 한다. 봄과 가을에는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한다. 이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거의 휴일 없이 일한다. 유일한 휴일은 신년과 金日成 및 金正日의 생일 같은 국경일뿐이다.



요덕에 있는 제15호 관리소內 혁명화구역과 제8호 관리소內 한 구역을 제외하고 관리소에는 재교육이 없다. 이들은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관리소 규칙을 위반하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식량배급을 줄이거나, 관리소內 구치소에 집어넣는다. 서 있거나 누울 수도 없는 이곳에서 몇 주일 지내면 혈액순환이 안 되어 죽는 수도 있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여기서 탈출하려다 잡히거나 중요한 규칙을 위반하면 다른 수감자들 앞에서 공개처형을 한다.



주로 제15호 관리소의 혁명화구역에서 탈출한 사람이나 경비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이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키가 작고, 마르고, 등이 굽는 등 여러 가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작업 중 사고로 팔다리를 잃거나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없었다고 한다.

半기아 상태 때문에 밀고자들이 많이 생겼고, 수감자들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이 조성되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나 죽은 사람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관리소는 내무성(1998년까지 사회안전부)의 경찰조직인 인민보안성이 운영하고 있다가 평안남도에 있는 제18호 관리소를 제외하고 모두 국가보위부로 넘겨졌다. 1973년에 창설된 국가보위부는 金正日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다. 관리소 외곽은 북한군 중에서도 특별한 부대가 경비를 한다.



관리소는 원래 10여 개가 넘었지만 몇 개가 폐쇄되었다. 특히 중국 국경지대에 있던 수용소가 폐쇄되었고, 현재 6개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중 4개는 이 보고서의 인터뷰에서 확인되었다.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401100078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학살조사 전문가 데이비드 호크의 북한의 강제 수용소 실태 보고서 요약









[ ..... "반혁명분자는 3대를 멸살 시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어린이들을 포함한 가족, 친척들까지 재판도 없이 은밀히 수용소에 감금한다 ....... ]




...........................................................................................

1. 관리소 (정치범 수용소)



현황 및 역사



북한 주민들은 정치범 수용소를 'OO호 관리소'라 부른다. 북한 당국에서는 기록상 조선인민경비대 예하 부대처럼 위장하고 있다. 예컨대 강철환씨가 수감되었던 함경남도 요덕 수용소는 '15호 관리소'라고 부르지만 기록상으로는 <조선인민경비대 2915부대>로 위장하고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역사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다. 1947년도에 지주, 친일파, 종교인 등 계급투쟁의 타도 대상들만 수용하는 마을 형태의 수용소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다가, 6.25전쟁 후 1958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 탄광지역에 최초로 통제구역을 설치했다.


북한은 1958년부터 실시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통해 전주민의 1/3인 320여만명을 '적대군중'으로 분류, 6천명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고 7만여 명을 내각결정 제149호에 의해 산간벽지로 추방하였다.


또한 1968년~70년 사이에는 '주민재등록사업'을 실시, 모든 주민들을 핵심-동요-적대 등 3계층 51개 부류로 구분하고 이들 중 '위해하다고 지목되는 자'나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 비판자 등을 구금시켰는데 이들을 격리수용한 곳이 바로 '정치범수용소'다.



함경남도 요덕 수용소의 역사를 보면 1958년경 요덕군 용평리의 일부 지역에 지주, 자본가, 종교인, 치안대(6.25 전쟁 당시 점령지역에서 치안관리를 위해 한국군이 조직했던 무장단체) 가담자들을 따로 거주시키고 수용했다. 1959년에는 당시 민족보위상이었던 최용건이 직접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요덕군 용평리, 평전리, 구읍리 일부, 대석리, 대숙리 등 5개 리를 합쳐 하나의 수용소로 만들었다.



위와 같은 수용소들이 1990년 초만 해도 11호부터 25호까지 일련번호를 달고 12군데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ㅇ아시아감시위원회(Asia Watch)와 미네소타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Minnesota Lawyers International human Rights Committee) 등 국제사회의 여론과 ㅇ중국이 개혁 개방됨으로 인한 외부로의 노출우려, ㅇ그리고 전쟁 발발과 같은 유사시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제 2전선을 형성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국경지대에 집중됐던 일부 수용소는 모두 폐쇄하고 현재는 다섯 군데가 위치하고 있다.



- 수용대상



여기에는 ㅇ김일성, 김정일의 독재체제에 대하여 비난한 사람 ㅇ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는 이유 ㅇ도서 출판물에 게시된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오손(汚損)시킨 이유 ㅇ외국의 방송을 청취했다는 이유 ㅇ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귀국한 귀국자들이 "외국이 북한보다 살기 좋았다"는 추억의 말 한마디에 '반혁명분자' '조국반역자' '인간 쓰레기'로 규정돼 수감된다.


또한 "반혁명분자는 3대를 멸살 시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어린이들을 포함한 가족, 친척들까지 재판도 없이 은밀히 수용소에 감금한다. 이런 사람들이 20여만 명에 달한다.



초기에는 적대계층 가운데서 종파분자, 반당, 반혁명분자, 과거의 지주, 친일파, 종교인 및 월남자 가족, 북송교포 가운데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자유세계를 동경 찬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당의 간부로 있다가 김일성 우상화와 김정일 후계자 강화 과정에 체제 비난으로 밀려난 반당, 반혁명분자들로 수용대상의 성격이 바뀌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미제의 고용 간첩', '혁명의 파괴분자'로 불리어진다.



매 수용소마다 범죄의 유형에 따른 특성이 있다. 함경남도 화성군 제16호 관리소는 주로 김일성 우상화 단계에서 종파분자, 반당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14, 15호 관리소는 김정일 후계과정에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자유세계를 동경 찬양한 자, 탈북 북송자(북한을 탈출했다가 해외에서 체포되어 북송된 자)들이 대부분이다.


수용소 내에는 '완전통제 구역'과 '혁명화 구역'으로 지역이 구분된다. '완전통제 구역'의 수용자들은 종신형이며, '혁명화 구역'의 수용자들은 결정된 형이 없이 사상 전향 상태에 따라 선택적으로 내보낸다. 혁명화 구역에서 전향자로 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완전통제 구역으로 옮겨져 종신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혁명화 구역은 사상전향의 시험장이라 하겠다.

...............................................................................................









[ ..... 무자비하게 탄압할 의무와 .......

..... 무자비하게 사살할 의무 밖에 없습니다.......

..... 수령님과 김정일 동지에게 기쁨을 드립시다....... ]




[ ..... 저게 소 우리냐 돼지우리냐?” .......

“아니 저게 사람이여 짐승이야? ........ ]




........................................................................................................


7. 제13호 수용소 경비대 생활의 시작




자동차가 장생마을 정문 안에 들어서자 13호 관리소장(대좌)와 보위 원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호송 군관이 대열을 정렬시키고 관리소장에게 보고하자 관리소장은 신병 20명을 모두 일일이 악수하고 수고했다고 하며 일장연설을 하였다.



“동무들은 우리 당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금싸라기들입니다. 동무들의 부모들이 수령님과 김정일 동지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처럼 동무들도 부모들의 뒤를 이어 계급의 전초선에서 초병답게 군사복무를 잘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13호 관리소는 당을 배반하고 수령을 배반한 악질적인 종파분자들과 그 자녀들이 있는 것 만큼 실랄한 계급투쟁의 현장입니다. 이 놈들은 언제든지 우리 수령과 당을 배반하고 반기를 들 놈들이며 그 놈들의 음모를 제때에 짓 부셔 버리는 것이 동무들의 임무입니다.”



“동무들도 신병훈련기간에 배우다 시피 여기 관리소내의 정치범들은 악질적인 반동분자의 자녀들로서 동무들의 신변과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 놈들은 악질들이기 때문에 동무들이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생각하면 그들은 앞에서 웃음 짓고 뒤에서는 칼을 빼 드는 놈들이며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동무들은 그들에게 언제나 경비대 선생님이며 그들 앞에서 위신을 꺾이거나 선생님(정치범들은 보위원과 경비대를 선생님이라 부르게 했다)의 자존심을 꺾는 일들을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동무들에게는 오직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의무와 도망치지 못하게 경계선(철책)을 철벽같이 지키며 한 놈이라도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무자비하게 사살할 의무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령님과 지도자동지 혁명전사 답게 살며 투쟁하는 것이며 그이의 전사된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동무들이 초소에 배치되면 이점을 명심하고 초소근무를 경각성 있게 수행하여 수령님과 김정일 동지에게 기쁨을 드립시다.”

..........................................................................


이 마을이 풍천 지구였다. 정치범들의 마을을 보는 신병들은 하나같이 입을 쫙 벌렸다.

“아니 이건 텔레비전에서 보던 남조선 거지 떼들의 집이 아니야? 저게 소 우리냐 돼지우리냐?”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댔다.


한 대원이 호송군관에게 “저 집들은 무슨 집입니까?”고 물으니 호송군관은 “저게 정치범들이 사는 집이야. 흥 저런 집도 과분하지, 살아 있는 것도 그들에겐 영광인데 집까지 주니 행복하지 뭐” 하는 것이다.


정치범들의 집은 하나같이 흙 토피(흙과 볏집으로 만든 일종의 블록)로 올려 쌓고 볏집 지붕을 올린 것이었는데 집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통나무로 버티고 있었다.

출입문이 어디고 창문이 어딘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꼭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 같았다.

1930년대 왜정시기 북한 TV에서 본 마을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드문드문 마을 가운데 큰 기와집과 네모 반듯하고 페인트칠까지 깨끗하게 하고 꽃 울타리를 만들고 마당에는 꽃으로 뒤 덥힌 집이 마을 가운데 하나씩 보였다.

내가 호송군관에게 물었다. “소대장동지, 돼지우리(집) 가운데 멋있는 집들은 무슨 집입니까?”

그러자 그는 “그건 담당 작업반 보위원들이 쓰는 담화실이고 저렇게 울타리로 둘러막고 대문에 별이 박혀있는 큰 기와집은 지구들이야”


내가 다시 지구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사회로 말하면 구역이나 동.리에 있는 분주소(일종의 파출소이나 그 규모가 남한의 경찰서보다 조금 적은 것.이 곳에 구류장도 있었다) 역할과 같은 것이야. 저기에 보위원들이 먹고, 자고, 일하는 곳이야”하는 것이다.

정치범들의 집들은 모두 금방 무너질 것처럼 기울어지고 통나무로 버티고 있었지만 담화실과 지구사무실은 궁궐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지구 사무실 주변 울타리 안에는 갖가지 과일나무를 모두 심어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


마을 주변과 밭에 정치범들이 일하고 있었다. 11호에서 보았던 똑같은 모습이었다.

옷은 모두 넝마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어느 천이 본바탕인지 가려 볼 수 없게 너덜너덜하고 힘겹게 김매기를 하는 모습이 처량하였다.

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헝클어졌고 호미자루에 의지하여 겨우 버티고 서있는 모습과 모두 여의고 뼈에 가죽을 씌운 인상 그리고 얼굴이 햇볕과 찌든 때로 인해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검실검실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 바짝 마르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우리 신병들이 타고가는 차를 퀭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것을 보는 신병들은 모두 “헉”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도 될 수있을까? 같은 사람인데도 경비대원 우리와 정치범은 어쩌면 저렇게 다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한참 후에야 신병들이 수군거렸다. “아니 저게 사람이여 짐승이야? 사람은 사람인데 꼭 인디안 같지 않아? 저런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벼른단 말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


13호 대대본부 운동장에 들어서서 대대장과 경비대 군관들의 환송식이 끝나고 병실 안에 들어서니 복도 양쪽과 좌우정면에 김부자의 "교시판"과 "구호판"들이 나붙었다.


“우리 인민의 계급적인 원쑤들이게 프로레타리아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김일성


“도주한 놈을 무조건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놈들이 도주하면 수령님의 대외적 권위가 심히 훼손됨으로 동무들은 초소를 철벽으로 지킴으로서 한놈의 도주자도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김정일


또한 “초소를 철벽으로 지켜 한놈의 도주자도 발생시키지 말자” “초병들이여, 당이 안겨준 계급의 무기를 억세게 틀어쥐고 경계근무를 철통같이 지켜 계급적 원수들과 적대분자들을 모조리 잡아내자” 등의 구호 판들이 나붙었다.

.......................................................................................................








[ ..... “담당 보위원 선생님의 지시에 불성실한 자, 불복종한 자는 즉시 총살한다” ....... ]




총살로 점철된 '北관리소 10대 법과 규정'

데이비드 호크 前 국제사면위윈회 美지부장 발제 요약



프리존(김필재)



북한인권 캠페인 주간(22~26일)을 맞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 대북 인권개선을 위해 전력해온 관련 단체들과 인사들이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범국민 캠페인을 시작했다. 25일 오후에는 서울프레스센터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내 정보자유 촉진 방안과 전망’, ‘포스트 김정일,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등을 주제로 전문가 워크숍이 개최됐다. 아래는 이날 ‘북한 사회경제적 체제 하에서의 관리소의 해체’를 주제로 발제에 나선 데이비드 호크 前 국제사면위윈회 美지부장 발언의 요약이다. <편집자 주>



총살로 점철된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


북한 정치범 수용소 출신 탈북자 신동혁 씨가 기억하는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은 2005년 1월에 탈출할 때까지 14호 개천 정치범 관리소에서 적용되고 있으므로 국제 인권규범들을 적용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에 따르면 경미한 규정위반들에 대해서도 총살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다.




▲제1조


1항 “도주시 즉시 총살한다”,

2항 “도주 기도시 목격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자는 즉시 총살한다”


▲제2조 1항 “담당 보위원 선생님의 승인 없이 다른 지역으로 무단 이동할 경우 즉시 총살한다”


▲제3조

1항 “무기류를 도둑질하거나 소지하고 있는 자는 즉시 총살한다”,

2항 “무기류를 도둑질하거나 소지하고 있는 자를 신고하지 않거나 공모한 자는 즉시 총살한다”,

3항 “관리소내의 모든 식량을 도둑질하거나 감추는 자는 즉시 총살한다”


▲제4조

1항 “담당 보위원 선생님에게 불만을 품거나 구타를 했을 경우 즉시 총살한다”,

2항 “담당 보위원 선생님의 지시에 불성실한 자, 불복종한 자는 즉시 총살한다”


▲제5조

1항 “외부인을 감추어두거나 보호한 자는 즉시 총살한다”,

2항 “외부의 물품을 소지하거나 감춘 자, 공모한 자, 신고하지 않은 자는 즉시 총살한다”


▲제7조

1항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에 태만하거나 수행하지 않을 경우 법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총살한다”


▲제8조 1항 “승인 없이 남녀 간에 신체접촉이 있을 경우 즉시 총살한다”,


제9조 1항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죄에 대해 불복종하거나 의견을 갖는 자는 즉시 총살한다



이 같은 규정들은 피수감자들을 철저하게 외부로부터 고립시켜 의견 및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억압하고 최소한의 신체적 자유도 박탈해 노예노동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로마규정 제7조 상의 ‘살해’, ‘절멸’, ‘노예화’에 해당된다... (중략)



여성들에 대한 성적 학대와 살해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된 여성들의 경우 얼굴이 예쁘게 생길수록 수난을 많이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위부장이었던 김병하는 관리소에 내려오면 자기 별장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들을 골라 동침하고는 보위부 3국(예심국) 국장에게 넘겨 실험용으로 쓰이다가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한 사례에 대해 같이 수감되어 있던 김영일을 통해 들은 김용 씨의 중언은 다음과 같다.


“14호 관리소에는 간부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평양에서 부부장급이 내려오면 숙식하는 일종의 특각이다. 평양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여성 수감자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21~25세 사이의 처녀들을 선발해 목욕을 시킨 후 간부들에게 바친다고 한다. 간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온갖 성적 노리개로 삼은 후 비밀유지를 위해 ‘도주분자’로 몰아 비밀리에 죽인다.”


이는 로마규정 제7조 1항에 규정된 강간, 성적 노예화, 살해의 죄를 저지른 것일 뿐만 아니라 북한이 가입한 ‘모든 형태의 여성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병하는 보위원들과 여자 수감원들 간에 성추문(부화사건)이 자주 생기자 모든 관리소에 얼굴이 곱게 생긴 여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라는 명령을 내려 1970년대 말에는 250여 명의 여수감원들이 처형됐다고 한다.

...........................................................


예고된 사고들



인명을 경시하는 정치범 수용소 내에서 각종 사고로 ‘정치범’들이 생명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명철 씨가 11호 관리소에 경비원으로 있었던 1987년 6월 어느 날 관리소 앞산 구역에서 불이 났는데, 약 2천명의 수감자들을 동원해 불을 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관리원들이 수감자들의 안전은 생각하지 않고 불 끄는 데에만 몰두해 수감자들을 불 속에 몰아넣는 바람에 5명이 질식해 죽었고, 2명이 불에 타 죽었다 한다.


안명철 씨가 22호 관리소에 있었던 1993년 10월 어느 날 초소를 허물고 다시 짓는 공사를 하면서 무리하게 서두른 바람에 골재해체 작업에 동원됐던 남녀 수감자 20여 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20여 명은 락생지구 야산에 공동매장 되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고 한다.



북한 정부가 외화부족으로 제 때에 군견을 확보해 주지 못하자 관리소에서는 수감자 감시를 위해 잡종견으로 민견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89년 5월에 13호 관리소에서 이 민견들이 학교에 갔다 오던 동포지구 19반 ‘정치범 여학생(13살) 2명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관리소 부부장은 민견 관리병들을 ‘개를 잘 길렀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1991년 22호 회령관리소에서도 중봉지구 29작업반 여자 ‘정치범’ 2명이 산에서 도토리를 줍다가 민견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조용히 암매장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 2008-09-25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4653&C_CC=AZ










[ ..... 충성하면 3대가 흥하고 배신하면 3대를 멸족시키는 3대관리제도 ....... ]



2010.3.15.



<연재> 북한의 '천국' 특권계급의 내막 (1)
'


김정일의 선물따라 '호화판 선물인생' 좌우
등급별 신분-이권 보장...3대까지 물려준다
외국지원품 선물가공 공장,햇볕후 규모 확장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貧富격차


김정일은 선물의 차별화로 자기 믿음의 무게를 강조하여 충성경쟁을 유도한다.
김정일은 특권층에게 명절마다 주는 이벤트성 선물이 아니라 삶, 자체가 선물인생이 되게 해준다.



* 내가 놀란 것 / 내가 쓸수 있는 것



2004년 한국에 입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면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점은 부유한 자유민주국가임에도 빈부격차는 북한보다 덜하다는 점이다. 물론 국부(國富) 격차로 양과 질적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북한 부유층은 일반적 수준의 형평성에서 크게 탈선한다.

그 이유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 가장 부유한 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재북 당시 김정일 “접견자” 신분으로 수령문학창작에 필요한 특권층과 그 가족을 취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김일성종합대학과 당 통전부 근무 과정에 북한 체제를 고집하는 계층의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나는 북한의 '천국'을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300만 아사의 지옥에 분노하여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쓸 수 있었다.

................................................................................


■ 김정일의 선물등급에 따라 달라지는 신분차별



남한의 특권은 부와 명예에 의해 규정된다면 독재자의 유일지도 권한이 권력을 분배하고 특권을 부여하는 북한에선 개인의 부와 명예란 곧 김정일의 신임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김정일이 한번만 매섭게 쏘아봐도 그 가문은 3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더욱이 북한 부유층은 충성하면 3대가 흥하고 배신하면 3대를 멸족시키는 3대관리제도가 그 어느 계층보다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누가 언제 어떤 선물을 받는가에 따라 측근의 서열이 정해지기도 하기 때문에 김정일은 선물의 차별화로 자기 믿음의 무게를 강조하여 충성경쟁을 유도한다.

가장 최상급 선물 대상은 특권층이다.
북한 부유층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특권층은 크게 두 부류이다.



신분과 이권을 대물림하는 귀족들


<권력형 특권층과 자본특권층>


첫째는 김정일 최측근으로서 권력형 특권이다.


이 권력형 특권층은 김정일의 업무 네트워크에 항시 접속한 인물들로서 언제든 김정일에게 자기 의사를 전할 수 있으며 체제불만을 품지 않는 한 자기의 신분과 지위를 대물림할 수도 있다.

또한 인사권과 행정 결정권을 남용하여 북한 내 모든 이권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구조적 특혜가 있다.



둘째는 김정일에게 돈을 많이 갖다 바친 공로로 외화사용의 합법성을 인정받은 자본특권층이다.


북한은 90년대 초반까지 자국민의 달러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해 왔다. 단 김父子에게 많은 돈을 헌금한 교포들과 그 친인척들에게만 특수성 명목으로 달러와 엔 사용을 허락했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북한 원화를 완전히 지배한 달러파워의 시초로 작용하기도 한다.


초기 북한 내 자본특권층은 교포 친인척들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교포사회의 세대교체와 조총련 약화로 최근에는 국내파들에게 그 우선순위를 양보했다.
국내파란 북한 시장을 주도하는 과정에 많은 외화를 벌어들여 갑부가 된 권력형 특권층 자녀나 친인척들을 의미한다.

특히 그 중에는 대남공작부서 후손들도 꽤 많다.

..............................................................................


인생자체가 선물...돈→금화+외국명품



김정일은 이 두 부류의 특권층에게 명절마다 주는 이벤트성 선물이 아니라 삶, 자체가 선물인생이 되게 해준다.


외화바꾼돈 환율이 안정적이던 1993년까지는 트렁크마다 일정 금액의 돈을 넣었지만 환율이 붕괴된 이후부터는 금화와 외국 명품으로 대체됐다.
북한조선중앙은행은 국가기념일이나 김父子 정주년에 맞춰 금 주화를 발행하는데 이 중 상당수가 김정일 명의로 최측근들에게 배당됐다.



특권층 자녀 결혼식용 다이어몬드 정기수입



특권층 부인들과 자녀 결혼식을 위해 고가의 다이아몬드도 정기적으로 수입하여 선물하곤 했다.
아마 탈북자 2만 명 중 금수산기념궁전에 보관된 김일성 관을 직접 본 사람은 몇 명 안 될 것으로 안다. 그 이유는 북한 정권이 신격화 차원에서 김일성 시신을 보는 것조차 영생하는 신의 접견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사후 북한 정권은 전체 인민에게 금수산기념궁전 재건을 위한 충성의 외화헌납운동을 호소했는데 그때 북한 특권층이 가장 먼저 2.5Kg의 다이아몬드를 모아 바쳤다.

.............................................................................

특권층이 다이어몬드 모아 김일성 관을 장식



방북 한국인들과 외국인들 중 특별히 금수산기념궁전 참배에 초대됐던 사람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김일성 머리 쪽 관 앞부분엔 붉은 색 조명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림 하나하나를 김정일 최측근들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어른 머리 크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이다.



김정일은 국가기념일 뿐 아니라 측근들의 가족 중 생일이거나 결혼식 등이 있을 때에도 세심히 챙겨준다. 심지어는 자녀 대학입학이나 졸업을 축하하여 선물공세를 하기도 한다.


당 작전부장 오극렬의 5번째 딸 오영희가 1989년 9월 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에 입학했을 때에는 건반이 상아로 된 독일 그랜드피아노를 선물하기도 했다.



직위별로 다른 선물...수십만 박스씩 전국 간부들에게



이렇듯 북한 특권층은 일반 주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 인생'을 살기 때문에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앙당 과장급 이하 간부들의 선물은 명절마다 직위별로 분류하여 전국에 일괄적으로 내려 보내는 집체선물이어서 공개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 선물들의 가치만 따져 봐도 만만치 않다.


해마다 조금씩 다를 뿐 설날이나 김父子 생일마다 메뉴가 거의 똑같은 중앙당 본부 직원들(2만명)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선물박스에는 레미마르탱, XQ, 헤네시, 나뽈레옹을 비롯한 고급양주 6병과 이태리 양복천, 두 번째 박스에는 곰열, 녹용, 인삼, 사향을 비롯한 한약재들, 3번째 박스에는 외국 가공식품들이 들어있다.



김정일의 선물등급은 중앙비서급 대상,(각 지방 도당 부장 이상급과 중앙 기관 및 단위책임자들, 북한 최고의 예술인, 과학자, 체육인 등 포함) 중앙 국장급 대상들(각 지방 도당 과장 이상급과 중앙 기관 및 단위 주요 국장, 부장급, 전국 공로자들 포함)로 분류된다.
이 선물들은 신분등급에 따라 각각 내용이 다르게 포장되어 주요 명절마다 수십만 박스씩 전국으로 배달된다.



스위스 금시계 세계최대 고객



김정일의 선물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스위스 금시계이다.
70년대부터 김일성, 김정일 “접견자”들에게 금시계 선물을 전통화한 북한 노동당은 아마 스위스의 최대 고객일 것이다.

1999년에는 고난의 행군을 혁명적 낭만과 정서로 극복하는데 기여했다며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 480명과 만수대예술단 국가독창조, 국가희극단, 등 700명의 예술인에게 개당 만 불이 넘는 롤렉스 금시계를 한꺼번에 선물로 준적도 있다.


2002년 4월25일에는 스위스에서 별도 주문한 김정일 이름이 새겨진 회중금시계 200개를 군 장성들에게 야전시계라며 선물한 적도 있다.



가장 말단 지방 간부들과 현지시찰 단위들에 보내는 김정일의 최하위 선물들은 국내산 상품 및 가공식품이거나 과일박스이다. 보관이나 운송과정에 잘 상하지 않는 수박이나 참외, 사과, 배가 주류인데 제주도에서 감귤을 보내면서부터는 과일선물에 감귤이 추가되기도 했다.



제주도 감귤 추가...선물정치로 경제 붕괴



북한 정권이 국가명절이나 김정일 생일에 맞춰 제주도에 감귤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일 선물들은 전국 주요 공장과 농촌들에 설치된 수십만개의 1호작업반들에서 생산된다. 사실 북한의 국가유일경제는 김정일의 선물정치를 위한 이 1호작업반 때문에 붕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호계획은 김정일 신격화 차원에서 국가계획위원회가 기획한 인민경제계획보다 더 엄격한 원칙과 법적 구속력을 가졌다. 더욱이 선물경제에 뒤이어 군수산업 제2경제도 우선시되며 자연히 인민경제는 하위권으로 밀려나 생산과 공급의 균형이 완전히 깨지게 됐고 결국 북한 경제는 김정일의 기형적인 당경제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3/15/ART42402.html










타워팰리스 보다 호화로운 '선물 아파트'


2010.03.23



북한 특권층이 사는 다른 세계, 다른 아파트



북한을 병영식 사회라고 하는 것은 업무시스템이나 사생활 시스템이 정권 충성으로 일원화 돼 있기 때문이다.

개인소유를 법적으로 차단한 북한에서 대를 물려가며 당당히 자기 소유권을 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아파트란 오직 김정일이 준 선물 아파트밖에 없다.


아파트 생활도 감시-관리 받는 조직생활


북한을 병영식 사회라고 하는 것은 업무시스템이나 사생활 시스템이 '정권 충성으로 일원화'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트란 개념도 사적 공간이 아니라 조직의 감시와 관리의 영역 안에 늘 속해있는 또 다른 조직생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모든 아파트는 기관아파트인 셈이다. 즉 중앙당 직원이라면 중앙당 사택을 사용하고 무력부 군인이라면 무력부에서 제공하는 군인사택에서 살도록 제도화 되어있다. 그래서 평양시 창광동에 중앙당촌이 있고 평양시 서성구역 석촌동에 인민무력부촌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각 기관마다 자체 아파트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관 아파트들에선 사적 자유가 충분치 않다.
출입자 명단과 주민들의 동향은 경비원을 통해 낱낱이 인민반장에게 전달되고 궁극적으로 동사무소와 구역당을 거쳐 해당 보위부와 당조직에 보고된다.


인민반 생활도 기관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연회와 회의, 각종 사회동원제가 매주 적용되는 당 생활 연장선이다.
이러한 동 인민반 시스템이 정상 가능한 것은 기관아파트란 명목으로 기관의 강제적인 지도와 간섭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죄 지으면 회수...충성도따라 보상받는 임시소유


..........................................................................

북한 모든 주민들의 현재 소유주택은 이렇듯 공화국 법적으로 엄격히 따지면 기관 근무 경력과 충성도에 따라 보상받은 임시소유에 불과하다.

대를 물려가며 당당히 자기 소유권을 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아파트란 오직 김정일이 준 선물 아파트밖에 없다.



직군별 선물 아파트들...배급제 붕괴후 매매 시작



평양시에는 간부들 전용 아파트는 물론 항일투사, 예술인, 작가, 체육인, 과학자, 교수, 박사들, 심지어는 중앙당 소속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직업별 분류와 개인별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이 많다.


이런 호화스런 선물 아파트들과 중앙당 퇴직 간부들을 위한 주택을 전문적으로 건설하는 곳이 바로 중앙당 재정경리부 건설담당 8국이다. 초기 중앙당 건물 보수 관리 전담형태로 시작된 이 8국은 70년대부터 김정일의 선물정치 선두주자로 승격되어 지금은 북한의 대연합기업소와 맞먹는 북한에서 가장 큰 건설업체이다.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은 비록 신분 분리를 통한 충성유도용으로 활용됐지만 한편 사유권이 박탈된 북한에서 주택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의식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1994년 배급제와 함께 주택공급 시스템도 붕괴되면서 북한 정권은 일반 주민들의 주택소유권도 법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심리적 권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먹을 것이 없어 마지막으로 남은 주택마저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북한에는 주택시장이 형성되게 됐고, 정권은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5명의 딸들과 사위까지 모두 기자, 작가였던 이유로 오극렬 일가와 가까이 지냈던 나는 은덕촌을 구경할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은덕촌처럼 생각하고 남한에 온 이후 강남에서 부의 상징이라는 타워팰리스에 들어가보고 크게 실망한적 있다.



장성들 전용 6개동...방12개 한개층이 한세대



오극렬, 강관주를 비롯하여 당과 軍 최고 장성들이 거주한 이 아파트는 총 6동으로 돼 있다. 2동은 조선노동당 측근들로, 4동은 군 측근들로 채워졌다.


인민무력부 청사경무부 한 개 소대가 주 교대제로 경호하고 있는 이 은덕촌의 출입일지는 매일 당조직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보고된다. 1동이 6층짜리(1층은 차고)인데 방12개와 부엌 2개, 화장실 세 개를 갖춘 한개 층이 통째로 한 세대이다.


마당처럼 넓은 거실은 두 면이 통째로 유리로 이어져 있어 햇볕이 잘 들게 했고,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에 방들이 있다. 서재에는 업무 전화와 깜빡이 안테나가 달린 김정일 직통전화가 있다. 이 전화들은 김정일 서기실 교환과만 연결돼 있는데 버튼식이 아니라 다이얼 수동식 전화기이다.



가족도 손 못대는 수동식전화...김정일 전화수신 전용



김정일과 관련해선 조금의 빈틈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반도체 부품에서 발생하는 전파도 차단하고 고장이 적은 수동식을 놓는 것이 원칙이란 것이다.


다이얼 가운데에 빨간 당 마크가 박힌 이 물건은 가족 중 누구도 감히 만져선 안 되는 오직 수신용전화기이다.



또한 은덕촌 모든 세대의 가구는 한국 에이스 침대회사 제품들이다.

한국 에이스침대회사 안유수회장이 김정일에게 행운의 숫자라며 선물한 333점의 가구들 중 일부를 은덕촌에 보낸 것이다.


구글 위성사진으로 이 지역을 살펴보면 총 7개의 건물이 있다.
그 중 한 건물은 주변에 대남공작부서 수장들과 인민무력부 초대소가 밀집된 정부관리 구역이라 좀처럼 정전이 없는데도 만약 경우를 감안하여 6동을 위해 설치된 디젤발전시설 건물이다.


서울 강남의 그 어느 아파트보다 더 호화스러운 이 은덕촌 같은 측근용 선물아파트는 그 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과 보통강구역 신원동, 대성구역에 총 100채가 건설됐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_s.html?no=42486&rvw_no=63








김정일, 암살 피하려 똑같은 차 많이 선물


2010.08.09



김정일이 하사품으로 선물한 외제 고급차만 800여대



특권층에게 주는 자가용 차번호는 김정일의 생일인 “2.16”으로 시작된다.

내가 탈출하던 2004년을 기준으로 평양시에만 0으로 시작된 김정일 선물 자가용외제차가 800대 이상이었다.

..................................................................................


북한에서 가장 마음 편히, 그리고 아무 제한 없이 위세를 뽐낼 수 있는 자가용은 김정일 선물 차들이다.


김정일의 선물 자가용 승용차는 두 부류이다.
하나는 최측근에게만 주는 신임용이고 다른 하나는 특출한 공을 세운 자들에게 주는 하사품이다.


김정일 선물 차들은 차별화를 위해 반드시 숫자 앞에 0을 붙여 “평양-0234”(234는 가상번호)로 돼 있다.

0의 숫자는 단순히 구별이 아니라 김정일과 관련해선 모든 숫자 앞에 우선한다는 신격화 의미이다.



김정일의 선물은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물 자가용들 중 독일차나 일본차들이 많다. 간부들은 물론 북한의 유명 작가, 교수, 역사학자, 체육인, 기자, 방송원들이 해마다 선물 자가용을 받는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선전선동에 더 의존하게 된 김정일은 이 분야에 많은 선물 차들을 줬다.



유명 배우-연출가-작가-작곡가들에 외제차 대량 선물



조선예술영화촬용소나 4.25영화촬영소의 유명 영화배우, 연출가, 작가, 작곡가들은 통근 버스가 아니라 선물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한다.


1996~1997년에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인민방송원들인 김주먹, 최성원, 전형규, 이상백, 이춘화, 조선작가동맹 시인들인 김만영, 오영재.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부총장 명준섭, 조선인민군창작사 상좌(중령)신병강, 보천보전자악단 작곡가 리종오, 4.15문학창작사 "김일성상계관인“작가들과 만수대창작사 인민예술가들인 화가, 조각가 등 선전분야에만 총 40대의 독일 벤츠와 일본 닛산 세드리크를 선물했다.


김정일이 ”나의 작가“라며 신임했던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시나리오 작가 리춘구에겐 5년 사이에 두 대의 최고급 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두 번째 차인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는 선물 받는 날 운전실수로 앞이 조금 구겨지자 이 보고를 받고 김정일은 당일로 똑같은 차종을 바꿔주기도 했다.


내가 탈출하던 2004년을 기준으로 평양시에만 0으로 시작된 김정일 선물 자가용외제차가 800대 이상이었다.

그것을 가늠하게 하는 증거로 2003년 말 제2경제지도위원회 99호총국장이 받은 선물자가용 차번호가 평양0862였다.


그 외에도 개별차가 아닌 2명 혹은 3명이 공유할 수 있는 선물 자가용 형태도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과 박사, 원사들, 평성과학원 박사들, 항일투사들과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준 차들이 바로 그 부류이다. 이런 경우는 직접 운전할 나이가 아닌 노인들이기 때문에 전문기사를 두고 돌려가며 차를 사용한다.



최고급은 최측근들에게...암살목표 피하려 같은 차종



김정일의 선물 자가용 중 가장 최고급은 최측근들에게 주는 차들이다.

특권층에게 주는 자가용 차번호는 김정일의 생일인 “2.16”으로 시작된다. 김정일 유일지도체제 확립 차원에서 중앙당 책임과장 이상의 모든 간부 차들도 같은 번호로 시작하는데 다만 최측근들의 자가용일 경우 선물차를 뜻하는 숫자 0을 넣어 이를테면 차번호가 “2.1602345”로 돼 있다.


김정일은 독일에서 신차를 들여올 때마다 최측근들에게 바꿔준다.
신하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북한처럼 최고급차가 흔치 않은 나라에서 자기와 똑같은 모델이 몇 십대 있어야 테러목표로 쉽게 노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포드, 크라이슬러, 독일 벤츠, BMW, 등 보통 몇 대의 선물 고급승용차들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들에겐 업무기사와 가족기사 2명이 있다.

2000년 김정일은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최측근들의 가족 전용차를 미국 밴인 스타크래프트로 모두 바꿔주기도 했다.



특권을 상징하는 2.160234번호판을 가진 차가 도로에 나타나면 거리의 모든 차들은 스톱된다.

이때는 신호등을 대신하는 교통 보안원들이 모든 차들을 세우는 것이 교통원칙이다.
인터폰 고장으로 미리 연락을 못 받았다 해도 절대 용납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차들만은 도로 중심으로 통행하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대뜸 알 수 있는 것이다.



평양을 방문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중구역과 보통강구역 등 중심 구역들에는 좌우차선 상관없이 도로 중앙에 노란 색 두 줄이 그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금지선은 일반차가 들어서선 안 될 오직 김정일과 그 특권층들의 차들에만 허용된 권력선이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_s.html?no=42583&rvw_no=63










[ ......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 ]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는 것은 우리 당의 최고 강령이며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의 새로운 높은 단계이다.


1)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며 대를 이어 계속해 나가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창건하신 우리 당을 영원히 영광스러운 김일성동지의 당으로 강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

1) 전당과 온 사회에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혁명적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수하기 위하여 수령님의 령도밑에 당중앙의 유일적지도체제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

...........................................................

4) 자신뿐아니라 온 가족과 후대들도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모시고 수령님께 충성다하며 당중앙의 유일적지도에 끝없이 사수하여야 한다.

........................................................................................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100789

북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전문

데일리NK | 2013-08-09







[ ..... 비당원들까지 빨간색 표지의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위한 10대 원칙' 작은 책자를 항상 소지하고 다니면서 암기 여부를 검증받아야 ....... ]


[ ....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가장 뛰어났던 김정일이 몸소 10대원칙을 만들고 실천했다는 ....... ]




"10대 원칙 어긴 말실수 때문에 요덕수용소 갔다"

10대 원칙, 북한인권 문제의 근원이자 최종 해결점



2013-08-09



북한이 최근 수정한 것으로 알려진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하 10대 원칙)은 북한 인권문제의 근원이자 최종 해결점이란 지적이 나온다.


1974년 4월 당시 후계자 신분이었던 김정일이 김일성의 환심을 사고 효과적으로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발표한 10대 원칙은 지난 39년간 북한주민들의 사상과 생활을 통제하는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10개의 원칙과 이를 뒷받침하는 각 세부 조항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소학교 '혁명역사' 수업시간에 배우는 '김정일 혁명역사' 수업에서부터 10대원칙을 배우게 된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가장 뛰어났던 김정일이 몸소 10대원칙을 만들고 실천했다는 내용이다.



10대 원칙의 구체적인 학습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에 가입하기 시작하는 중학교 시절에 본격화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노동당 산하 외곽조직들이 가입하게 되면 매 주말마다 진행되는 '조직생활총화' 시간에 10대 원칙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상과 생활을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



국내입국 탈북자 김영순(가명)씨는 데일리NK와 통화에서 "북한에서는 일반 당원은 물론이고 비당원들까지 빨간색 표지의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위한 10대 원칙' 작은 책자를 항상 소지하고 다니면서 암기 여부를 검증받아야 했었다"고 말했다.



10대 원칙 8조 5항에서는 "2일 및 주 조직생활총화에 적극 참가하여 수령님의 교시와 당정책을 자(尺)로 하여 자기의 사업과 생활을 높은 정치사상적 수준에서 검토총화하며 비판의 방법으로 사상투쟁을 벌리고 사상투쟁을 통하여 혁명적으로 단련하고 끊임없이 개조해 나가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죽어서야 끝난다는 주(週) 총화 모임에서는 10대 원칙을 주로 인용하여 자신을 비판하도록 지시 받는다. 한편으로는 10대 원칙을 인용해 이웃이나 동료, 친구를 억지로라도 비판해야 할 때도 있다. 북한에서 말하는 '호상(互相)비판'이다. 정치범 수용소나 교화소 등 구금시설에 수용될 경우에는 취침전에 다른 수감자들과 단체로 매일 10개의 주요원칙을 큰소리로 제창(齊唱)해야 한다.



10대 원칙에는 주민들의 가치관이나 조직생활 기준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 준칙까지 담겨있다. 김일성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사진, 조형물, 현지 교시판(版), 당의 구호 등을 정중하게 관리하고 철저하게 보위(保衛)하는 것은 물론이고 김일성이 다녀간 시설이나 김일성의 과거사를 전시한 시설물도 잘 지켜야 한다(3조 6항,7항)는 내용도 있다. 이번 수정에 따라 김정일과 관련된 것도 똑같이 적용된다.

.............................................................................................................................................











[ ..... 당신들은 무의식중에 당과 정부의 유일체계에 걸리는 발언을 해서 이곳에 ....... ]



[weekly chosun] [김영순의 육필 수기] 체포에서 탈북까지 처참했던 나의 35년

김대현 기자 2009.01.02



..................................................................................................................


“당신들은 무의식중에 당과 정부의 유일체계에 걸리는 발언을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통제구역입니다. 여기서 정말 당과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투신했을 때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함경남도 요덕군은 서쪽에 맹산군, 북쪽에는 평안남도 대흥군, 동쪽은 금야군, 남쪽은 고원군의 수동 탄광지대와 마주하고 있는 해발 1700m의 험준한 산악지대다. 요덕수용소는 용평리, 평전리, 구읍리, 입석리, 대숙리 등 5개 리를 합쳐서 만들었다.



철조망 속에서 보면 험준한 능선밖에 보
2021-01-13 19:24:25
1.233.121.8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