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장애인 야학이 나갈 길을 제시한다_작은자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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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장애인 야학이 나갈 길을 제시한다_작은자야학
  • 정은경 기자
  • 승인 2023.02.24 15:32
  • 수정 2023-02-24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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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퇴근 시간에 찾아가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작은자야학이다. 동지가 지나 겨울 해는 조금씩 길어지고, 입춘이 지나 겨울 속에서 봄을 찾는 2월 초 작은자야학을 찾았다. 인천 간석오거리 전철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닿을 수 있는 세아빌딩 6층. 이 지리적 이점 때문에 15년 넘게 따뜻한 불을 밝혀 향학열을 가슴에 품은 학생들을 맞고 있는 작은자야학의 보금자리다. ‘작은자’란 이름은 ‘낮은 사람이 돼 항상 어려운 사람을 섬기겠다’는 의미로, 작은자야학은 장애인은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배움에서 소외됐던 비장애인들을 위한 학교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연배들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기만은 청년 못지않은 그들과 42년의 역사를 쌓아온 작은자야학의 오늘을 만나 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야학, 그리고 유일한 장애-비장애 통합 야학, 일주일 닷새 교실에 불이 환히 밝혀 있는 야학, 바로 ‘작은자야학’이다. 1981년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개교 42주년이나 된다. 만만치 않은 역사다. 그 만만치 않은 역사를 바탕으로 작은자야학은 지금 전환점에 서 있다.

 

2023년 주간 성인발달장애반 운영

장애인평생교육시설로 가는 계기

 

“올해부터 교육청 지원을 받아 발달장애인 평생교육반을 2개 반 주간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교사 2명을 지원받게 되면서 저까지 3명이 교사로서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주간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지금까지 40년 넘게 줄곧 야간반만을 운영해오던 작은자야학(야학이란 자체가 야간학교의 준말이다)이 주간 수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07년 이후 작은자야학의 사무국장을 맡아왔던 장종인 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야학 체제로는 장애인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성인 발달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든, 일을 하든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간 시설이죠. 특히 학령기를 벗어난, 즉 학교를 졸업한 장애인들에게 평생교육을 제공하는 건 아주 시급한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야학도 차츰 주간 평생교육시설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소박한 규모지만 주간반을 운영할 수 있다는 의미가 크죠.”

물론 교사 지원이란 성과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작은자야학의 역사에 ‘그냥’이란 것은 없듯, 이 역시 지난한 요구와 설득의 결과다. 작년과 재작년 장종인 국장은 교육청을 무수히 드나들면서 교사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자원봉사 자원에 교사 인력을 기대어서는 전문적인 교육이 힘들다, 장애인들이 요구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위해서는 교강사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낮 시간에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지원을 해 달라 등등 요구를 하고 끊임없이 설득했죠.”

그런 노력의 결과, 2023년도부터 교사 두 명에 대한 인건비 지원이 이뤄지고, 덕분에 전임 교사 2명을 선발해 주간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 아쉬운 점은 한 반 4명씩으로 8명을 정원으로 학생을 모집했는데, 홍보가 덜 되어서인지 아직 3명이 미달이라는 점. 물론 곧 채워질 전망이지만 그래도 혹 모르니 “홍보 좀 해 달라”며 장종인 사무국장은 웃었다.

 

남의 집 마당 컨테이너에서 밝힌 불

‘특수교육법’ 제정 이후 안정적 운영

 

정규직 교사 채용이 야학의 전환점이라는 게 기자에게는 다소 놀라운 일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1970~1980년대 들불처럼 일었던 야학 운동의 주체가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 장애인 야학도 마찬가지다.

처음 작은자야학을 시작한 사람은 1981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도진(현재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목사)이었다. 교생 실습을 하고 있던 김도진의 지인이 “장애인들이 글을 모르니 취업을 해도 오래 가지 못하고 며칠 만에 해고가 되곤 한다.”는 말을 건넸고, 김도진은 그럼 그들에게 ‘글만이라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당시 장애인시설 성린아동직업재활원(현 성촌의집) 마당 한 구석에 야학을 열었다. 그때 이름은 김도진이 관계하고 있던 교회였던 미문교회(현 미문일꾼의교회)의 이름을 따 미문야학이었다. 교실도 없었다. 야학을 하고자 모였던 대학생 자원봉사 교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컨테이너를 마련했고, 거기서 장애인들과 가나다라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작은자’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7년. 교회와는 독립적으로 야학을 지속 가능하게 해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새 출발이었다. 이름을 바꾸고도 교실은 컨테이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의 지원도 없이 자원봉사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야학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 불법 건축물이니 철거하라는 구청의 요구가 있었고, 낡은 시설의 리모델링 계획을 수립한 성촌의집의 사정도 겹쳐 학교를 옮겨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2007년의 일이었다.

이미 2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애인 야학 작은자야학의 철거 소식은 화제의 중심에 서기에 충분했고, 작은자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많은 격려를 받았다. 작은자야학 철거 소식이 전해진 2008년 무렵 여러 언론에서 이 소식을 다루기도 했다.

“당시에 한 스무날 정도, 교육청 앞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했던 것 같아요. 마침내 교육청에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죠. 물론 거기에는 2007년 제정된 ‘특수교육법’(‘장애인등에대한특수교육법’)의 영향도 컸죠. 지원의 법적 근거가 생겼으니까요.”

2009년 인천교육청에서 공간 문제 해결에 나서주었다. 작은자야학이 입주할 건물의 전세보증금을 지원해준 것. 그렇게 들어온 건물이 지금까지 작은자야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는 간석오거리 세아빌딩 6층이다.

“2009년은 아마 우리 야학 역사로 보면 두 번째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전환점이 작은자야학으로 거듭나면서 장애인 야학의 독립성을 선언한 것이었다면 2009년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 해였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교사들과 일부 활동가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운영하다 보니 우리가 내년에도 야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늘 있었죠. 그런데 2007년 ‘특수교육법’이 제정되고 2009년 인천교육청에 장애인평생교육시설로 등록을 하니 많지는 않지만 교육청과 시청에서 시설 운영비와 프로그램 강사비 등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덕분에 한숨 돌린 셈이죠. 이제 우린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뭐 이런 안도감도 있었고요.”

 

저녁에 글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

배울 의지와 가르칠 의지만 있으면 OK

 

물론 그럼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야학’이란 형태의 학교가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학생도 낮에는 일을 해야 했으므로 학생과 교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형태였지만 장애인의 경우, 학습자의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교수자, 즉 교사들의 사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다른 직업을 가진 자원봉사자였기 때문에 야학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 학생들은 낮에 오는 게 더 좋죠. 장콜(장애인콜택시)도 수업이 끝나는 9~10시에는 몇 대 운행도 안 하고, 밤길도 위험하고…. 하지만 선생님들이 낮에는 다 생업이 따로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주간 정규직 교사 인력 지원은 야학이 명실공히 장애인 평생교육시설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는 건 설득력이 있다.

그럼 이제 작은자 ‘야학’은 점차 없어지는 수순을 밟는 것일까. 장종인 사무국장은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야학은 인천에서 밤에 배울 수 있는, 그것도 매일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에요. 다른 야학도 있지만 일주일 내내 수업하지는 않거든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프로그램별로 운영을 하지, 저희처럼 주 5일 수업을 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한글반도 저녁 시간에 매일 와서 배울 수 있는 곳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심심치 않게 ‘공부를 배울 수 있냐’며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기자가 작은자야학을 찾은 날도, 나이 지긋한 여성 한 사람이 “여기서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하던데…” 하며 교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곳의 학생은 장애인만이 아니라는 점도 야학이 쉽사리 없어질 수 없는 이유다. 작은자야학은 장애-비장애 통합 야학이다. 1998년부터 장애인들과 비장애인이 함께 한글도 배우고, 수학도 배우는 통합 야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학생 수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배움을 위해 문을 두드리는 노인(특히 여성)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야학을 찾는 사람이 있는 한 야학은 건재해야 한다는 게 작은자의 소신이다.

현재 작은자야학의 재학생은 대략 40여 명 정도다. 한글반 3개 반과 검정고시반(중졸, 고졸), 새로 시작하는 주간반, 기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최근 들어 검정고시반은 점점 학생이 줄어 올해는 고졸반은 아예 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특수교육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령기 아이들이 법에 따라 학교로 흡수되면서 아무래도 검정고시반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줄고 있습니다. 대신 이제 문제는 ‘특수교육법’ 적용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 사회로 나오는 시점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평생교육시설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많이 줄지는 않았다. 계속 학습이 요구되는 대상자들이기도 하고, 문해교육이라는 게 단순히 글자를 해득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생활 문해(사회생활 전반의 흐름을 읽고 사회 적응 훈련을 하는 부분 포함), 디지털 문해(예, 키오스크 사용법)로까지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학생 수만큼이나 교사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야학은 기본적으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젠 대학생 교사는 거의 없는 실정.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교사로 봉사해오던 사람들이 계속 교사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나이대도 30대 이상이 많다.

새로운 전환기에 선 야학이지만 작은자야학은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누구든지 가르치고 배울 의지만 있다면 대환영이다. 장애인등록도 필요 없고, 교사자격증이 없어도 된다. 그리하여 작은자야학은 배움에 열려 있는 모두의 공동체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시설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배움터다.

“작은자야학에서 배움의 꿈도, 선생님의 꿈도 이뤘어요”

오연수 작은자야학 교사

 

야학역사 42년, 결코 짧지 않은 역사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배워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교사 오연수가 그다. 오연수는 현재 작은자야학 한글고급반 선생님이다. 동시에 그녀는 이곳 학생들의 동문 선배다.

“제가 처음 작은자야학에 온 게 2004년인가, 2005년인가였던 것 같아요. 동암역 뒤편 컨테이너 교실에 있을 때였으니까…. 어찌 보면 작은자야학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고졸 검정고시반으로 시작했어요.”

오연수 교사는 작은자야학에 오기 전에 이미 중졸 검정고시를 마친 상태였다. 고졸 검정고시에서 몇 과목 미진한 게 있어 작은자야학의 문을 두드렸고, 장애-비장애 통합 수업을 하던 작은자야학에서 공부해 마침내 고졸 검정을 마쳤다. 그리고 2007년도에는 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니까 여기 선생님들께서 이제 배운 거 환원해야지 하며 교사 봉사를 하라고 마구 권하셨어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돌아보니 제가 꿈이 ‘선생님’이었더라고요. 저도 잊고 있던 꿈을 선배 교사들이 일깨워 준 거죠.”

월요일 7시, 오연수 교사가 지도하는 교실을 잠깐 들여다봤다. 수업 도중 잠깐 인터뷰를 위해 나왔다 들어간 것이 궁금했던 학생들은 야학의 역사를 질문했고, 오 교사는 “우리 작은자야학은요~~” 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야학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 학생들과 교사는 언뜻 봐도 비슷한 연배. 그래서 더욱 공감대 형성이 잘 된다는 게 오 교사의 말이다.

“제가 어렵게 공부했잖아요. 그러니까 제도권 정상적으로 학교를 나온 사람들보단 여기 학생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학생들의 욕구 파악도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수업이 재미있고요.”

그녀가 맡고 있는 반은 ‘진급반’이라고. 이 반을 끝내고 중학교에 갈 사람들이라며 “내가 맡은 뒤로 30명 정도가 진학했어요.”라고 자랑스러워한다. 그중엔 고등학교까지 간 제자도 있다고.

“가끔 밥 먹자고 전화하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보람이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게 거기가 나의 오늘을 있게 한 곳이라는 게 제 생활에 비타민이 되는 거 같아요.”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저녁마다 야학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던 생활도 올 3월부터는 바뀔 것 같다. 물론 야학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3월부터 시작되는 작은자야학의 주간 발달장애인평생교육반 담당 교사로 정식 채용된 것. 이십 년 넘게 배움터였고 나눔터였던 작은자야학이 ‘선생님’ 오연수의 꿈을 이룬 직장이 된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힘들겠지만 또 훨씬 재밌을 거 같아요.”라며 한껏 설레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오연수 교사에게는 배움과 가르침이 주는 기쁨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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