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큰 걸 달라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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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큰 걸 달라는 게 아닙니다
  • 편집부
  • 승인 2022.12.15 11:42
  • 수정 2022-12-15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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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_시각장애인 칼럼니스트

월드컵에 출전한 탑클래스 선수들의 주급은 내 연봉의 열 배를 넘나든다. 일 년이 52주인 것을 단순하게 계산하면 내가 그들의 1년 연봉만큼 벌려면 520년만큼 일해야 한다. 그들이 세계 최고의 실력과 인기를 가지고 있는 선수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보다 500배 정도 더 큰 노력을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내 노동의 가치가 그들의 5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선수들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천문학적인 연봉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한두 배 좀 크게 잡으면 열 배 정도의 차이는 어떻게 발버둥이라도 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라도 드는데 몇백 배 차이는 현생 추격 불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고 그보다 몇 걸음 더 달려도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의욕 떨어지게 하는 일이고 그것은 실질적 불공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수에게 집중된 자본은 다수는 소유할 수 없는 재화를 만들어 내고 많은 이들은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것과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전면적인 부의 재분배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시대적 흐름이 운 좋게도 축구를 국제적 인기스포츠로 만들고 세계 부호들의 자본경쟁 속에 높은 주급이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과정은 축구 잘하는 이들에겐 특별한 행운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에겐 분배의 불공평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들의 연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비싼 가격의 티켓이나 중계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 국가가 없었다면 자연 생태의 우리들은 그 불편한 분배의 상황에 대해 매우 과격한 방법으로 개선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재분배의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각각의 국가가 존재하고 국가는 그러한 극단적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율을 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많이 버는 이들에겐 높은 요율의 세금을 징수하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들에겐 복지혜택을 제공한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조치들로 인해 축구선수만큼 벌지 못해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는 최소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처럼 전용기를 타고 여행하지는 못하지만 조금 노력하면 여객기 정도는 탈 수 있고 온몸을 명품으로 두르지는 못해도 맘에 드는 옷을 입을 수는 있다.

특별히 그것이 공공의 영역이라면 그 공평은 더욱 엄격하게 동등해진다. 비행기는 돈 많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좌석 크기가 다르지만, 버스나 지하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백화점에는 VIP룸이 따로 있겠지만 주민센터에서는 똑같이 줄을 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세게 운 좋은 그들에 비해 우리는 노력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박하게 인정받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공평함으로 자신을 평등한 사회의 시민이라고 정의한다. 완벽히 똑같은 크기의 자본을 분배받는 것이 최선의 평등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바라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여전히 거리로 나와 이동권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의 바람도 겨우 그 정도 수준임을 나는 알고 있다. 급하면 달리고 아무 곳에서나 택시라도 잡아타고 낯선 장소에서도 2층이나 3층이나 올라갈 수 있는 건강한 이들의 움직임은 휠체어 탄 이들에게 500배 이상의 연봉만큼이나 따라잡을 수 없는 불가능의 이동권리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 비해 억세게 운이 좋아서 멀쩡한 두 다리를 가졌을 뿐이다. 무언가 큰 노력을 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시위하는 이들이 500배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처럼 걸을 수는 없다. 정말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세금을 걷듯 우리도 그들에게 최소한의 재분배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다리 한쪽 혹은 반쪽씩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최선의 평등이 아닌 것쯤은 나도 알고 그들도 안다. 세상 모든 건물과 땅들이 당장 휠체어 가진 이들이 두 다리로 달려가는 이들만큼 평안해지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버스의 모든 좌석의 크기가 동일한 것처럼 주민센터에서는 누구나 줄을 서야 하는 것처럼 공공의 교통과 건물들만이라도 동등하게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협의 대상도 더 이상 양보의 논제도 아니다.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난 호날두도 손흥민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박수를 보냈다. 내가 그들만큼 벌지 못하지만, 그들이 많이 버는 것과 관계없이 나 나름의 행복추구권을 충분히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내가 빼앗긴 권리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엔 우리가 지켜주지 못한 권리로 이동권을 박탈당한 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수많은 휠체어가 우리의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기 전에 그들이 우리의 출퇴근길에 왜 보이지 않았는지 조금이라도 고민해야 했다. 우리가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그 길의 한켠에라도 휠체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시설들을 생각해야 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그들은 왜 우리의 출근길을 막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왜 우리는 모든 길을 독점하고 있었는가?’로 전환해 볼 때이다. 우리가 호날두를 부의 독재자나 욕심쟁이라고 욕하지 않는 것은 큼만큼 벌지 않아도 나름 살만한 최소한의 환경들이 우리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숨 쉴 수 있는 작은 구멍 하나씩은 만들어 줄 때 비로소 우리가 큰 다툼없이 함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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