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특집]제14회 전국장애인문학공모전 수상작(금상)_‘불가능(不可能)’_ 권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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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특집]제14회 전국장애인문학공모전 수상작(금상)_‘불가능(不可能)’_ 권오용
  • 편집부
  • 승인 2022.06.10 11:25
  • 수정 2022-06-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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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공사와 기호일보가 주최하고 인천시 중구장애인종합복지관이 주관한 '제14회 인천공항과 함께 꿈, 그리고 세상을 잇는 장애인문학공모전' 수상작 시상식이 5월 11일 열렸다. 입상자는 장애인 부문과 비장애인 부문으로 나눠, 대상·금상·은상·동상·가작을 합쳐 모두 25명이 수상했다.
공모전 대상은 윤동현 씨의 운문 ‘쌍둥이 장애인의 아버지’가, 금상은 2명(조요섭 운문 ‘한 채의 공항’, 권오용(지체장애 경증, 경북)씨 산문 ‘불가능不可能)’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장애인생활신문'은 이번 공모전에서 수상한 윤동현, 권오용 씨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써 내려간 그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오리는 나무에 오를 수 없고, 닭은 물에서 헤엄칠 수 없다. 같은 조류지만 서로 다르기에 실현해 낼 수 없다. 불가능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도 서로 다르다. 오리와 닭이 각기 옹골찬 환생(還生)의 꿈을 꾼다고 해도 이룰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시간 짧은 글짓기 수업 때 담임선생님이 칠판에 불가능이라고 쓰고 강O규를 지명하고 예문을 쓰라고 불러내었다. 쭈뼛쭈뼛 나간 놈이 칠판에 쓴 글은 이러했다. ‘불가능 - 오용이가 달리기를 할 때 일등은 불가능하다.’ 
 교실은 웃음으로 교실이 떠나갈 것 같았고 당황한 담임선생님도 얼굴이 벌게지셨다. 놈은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았지만 나는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여 울었다. 그놈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곧 마침종이 울려 선생님은 교무실로 가버렸고, 아이들도 제각기 떠들며 운동장으로 나갔지만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흐느끼며 울었던 기억은 60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 가기가 싫고 두려워 집에서는 나와서 학교에는 가지 않고 강에서 혼자 놀았다. 활발히 헤엄치는 피라미가 친구였고, 맘대로 높이 날아다니는 나비와 물잠자리와 놀았다.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것이 보이면 나도 저만치 뒤떨어져 집으로 갔다. 
 학교에 가도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전부 등 돌릴 사람만 있는 학교는 나에게는 무덤이었다. 집이 동네에서는 떨어진 거리에 있어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마을을 다녀오신 조부님이 그 사실을 아셨다. 난 어둡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자초지종을 들은 부모님이 나를 찾아 나섰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만났을 때는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뒤돌아서 하늘을 보시기만 하신 아버지는 야단도 안 치셨다. 다만 나지막이 타이르셨다.
 “그렇다고 학교에 안 가면 까막눈이 되어 이 산골에서 지게 지고 흙 파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너는 지게도 못 지는 몸이 아니냐. 다른 사람보다 몸이 부실하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여 보란 듯이 살아야지.”
 저녁도 안 먹고 흐느끼며 울다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에 나는 산천을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었다. 평상시의 희망이 꿈에 나타난 것이다. 이런 비슷한 꿈은 자주 나타났다.
 조부님이 교무실로 와서 담임을 만나 항의를 하고, 사과를 받고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해마다 우리 집에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땔감을 지원했는데 조부님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그해 나무 지원을 하지 않아 추운 겨울날 전교생이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산골 동네인지 국수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하여 마을에 혼사가 있는 날은 온 동네 아이들이 몽땅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을 이해해서인지 선생님도 별반 나무라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다 안 가도 나만 학교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다만 어린 마음에도 학교에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멍울진 어머니 가슴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5학년 때 담임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6학년이 되었다. 학년이 바뀌어도 달라진 것은 별반 없었다. 보건 시간(체육시간)은 어김없이 시간표에 있었고, 체육시설이 없었을 때이니 주로 편을 갈라서 달리기를 시켰다. 다른 선생님과 달리 달리기를 할 때 나는 나무 그늘에서 쉬게 했다. 친구들이 어금니를 물고 뛰는 것을 구경만 했다. 정말 고마웠다.
 가을 운동회, 지금은 아이들도 많지 않기에 운동회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시로는 운동회는 면민(面民) 잔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운동회지만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바라는 것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운동회 전날 교무실로 담임선생님에게 가서 내일 학교에 안 오겠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안 된다. 내일 운동회 때는 갓 쓴 할아버지와 꼭 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등을 두드려 주셨다. 달리기 말고 우리 반에서는 물건 구해오는 경기가 있었다. 10M 정도 달려가서 쪽지에 적힌 물건을 가지고 결승점까지 가는 경기였다. 대개 물건은 운동화, 머리띠, 연필, 공책, 필통, 모자 등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담임을 찾아간 얘기를 했고, 갓 쓴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얘기를 하니 어머니가 아마 구해오라는 물건은 갓일 것 같다고 했다. 
 운동회 날 갓 쓴 할아버지와 부모님, 고모와 친척까지 나를 응원하기 위하여 전부 결승점에 계셨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선생님의 출발 총소리가 났다. 출발은 당연히 내가 먼저 했지만 몇 발짝도 못 갔는데 아이들은 벌써 저만치 멀리서 뛰어가고 있었다. 뛰니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탄식의 소리로 가득했다. 아이들이 다 가지고 가고 나머지 한 장을 누가 주워 주었다. 내가 뛰는 조의 10명은 전부 갓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갓 좀 달라고 소리치며 운동장을 돌았지만 당시 갓은 귀했고, 비싼 갓을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벗어 줄 노인은 없었다. 억지로 뛰어 결승점에 가니 할아버지는 이미 결승점에 미리 와 갓을 들고 서 계셨다.
 전부 박수를 치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기뻐하시며 눈물짓던 어머니의 기쁨은 가을 하늘보다 높은 듯했다. 갓을 구하지 못한 다른 아이들은 전부 탈락했고 나 혼자 일등이었다.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강O규 놈을 이번에는 이겼다. 그 아이는 ‘오용이가 운동회 달리기를 할 때 일등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선생님의 배려로 운동회 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리 반에 차O석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는 못해서 늘 나머지 공부를 했지만 달리기는 반에서 제일 잘 뛰었다. 숯을 굽는 일을 하던 그 아이 아버지도 운동회 때 단축 마라톤을 하면 몇 년 동안 늘 일등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가져가는 상품만 해도 엄청났다. 나도 나머지 공부를 하더라도 달리기를 잘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꿈에서나 가능해 보였다.
 6.25 전쟁 때에 태어난 나는 총알에서 묻어왔는지 소아마비에 걸려 어린 시절을 이렇게 초라하게 보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10Km 정도 되었다. 집에서는 가장 먼저 나섰지만 학교에는 가장 늦게 도착했다. 지각을 해도 선생님들은 내 사정을 아셨기에 야단도 안 치셨다.
 비 오고 눈 오는 날들이 힘들었다. 신발과 옷이 변변찮아 추웠지만 농한기 때는 아버지가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 줄 때도 많았다. 당시에는 나 말고도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천여 명 전교생 중에 나를 제외하고는 학업을 포기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중학교에 갈 형편도 아니었지만, 몸이 부실하니 펜으로 먹고 살라고 안동으로 조부님이 유학을 보내 주셨다.
 학과 시험은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체력장에 또 막혔다.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던지기 네 종목에 5점씩 해서 20점이 만점이었다. 아무리 학과 시험을 잘 보아도 체력장이 0점이라 걸림돌이 되어 낙방이 되었다. 
 전기 학교에는 떨어지고 후기 중학교에 갔다. 떨어진 학교 교문을 지나서 가야 했지만 꼴도 보기 싫어 멀리 돌아서 3년을 다녔다. 1학년 가정실습이라고 우리 학교만 가지 않는 날 낙방한 학교 근처에 숨어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숨어서 봤다. 나처럼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재수를 해서 갈 생각으로 봤지만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중학교에 가니 놀림감은 되지 않았다. 나 말고도 우리 학년에 3명 정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다. 전교 도서부원을 모집한다는 게시판을 보고 응모했다. 3년 동안 다른 친구들이 낙동강에 목욕하고 놀 때 나는 도서실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때는 주로 위인전이나 세계명작,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즐겨봤다. 너른 세계의 모습과 풍물을 전한 책은 세계를 향해 넓은 창을 제공해 주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사회 교사(38년 정년퇴직)가 되게 한 나의 길잡이였다. 세계명작은 나의 글 쓰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코흘리개 맨발의 어린 시절, 양지쪽 마당의 웃음소리를 외롭게 들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의 길을 찾아서 열심히 살았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다. 나무에 못 오르는 오리와, 물에 못 들어가는 닭은 발부터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장점도 함께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무수한 슬픔의 기억은 시련을 견딜 수 있는 굳은살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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