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명국가의 55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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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명국가의 555명
  • 편집부
  • 승인 2022.04.21 09:52
  • 수정 2022-04-21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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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인/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국장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4월 19일 발달장애인 가족 555명이 청와대 앞에 모였다. 그들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식을 진행하고 청와대에서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까지 행진을 했다. 이들은 20일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가 인수위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할 예정이다. 사실 장애인부모들의 삭발과 단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수차례 발달장애인 권리를 요구하며 삭발과 단식을 이어왔고 그 투쟁으로 인해 ‘특수교육법’이 제정되고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되는 성과도 있었다. 지난 2018년에는 ‘발달장애인국가책임제’를 요구하며 209명이 삭발하고 3,000여 명이 삼보일배를 진행하며 청와대 앞 천막농성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발달장애인 생애주기별 종합대책’이었다. 그런데 왜 장애인 가족들은 다시 삭발과 단식에 나서게 되었는가.

장애인 가족들의 끈질긴 투쟁이 소기의 성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는 발달장애인국가책임이라는 근본적 대책에는 훨씬 못 미친 미봉책으로 장애인 가족들의 투쟁을 달래왔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작년부터 현재까지 1년 남짓의 시간만 헤아려도 7, 8건의 발달장애인 관련 사망사건이 있었다. 돌봄부담, 경제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장애인 자녀를 살해한 극단적 사건들만 헤아려도 이 정도인데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장애인 가족들의 고통은 어떠했을지 이루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당선인의 발달장애인 관련 공약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장애영유아를 위한 국가 조기개입’이라는 달랑 한가지 공약이 윤석열 당선인의 유일한 발달장애인 공약이었다. 발달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촘촘한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발달장애인의 삶은 기약 없이 다시 내팽개쳐졌고 장애인가족들은 다시 삭발 투쟁을 진행했다. 이날 삭발 투쟁에 참가한 인천의 한 장애인 어머니는 “다리를 잘라달라는 것도 아니고 심장을 빼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껏 이 머리카락, 얼마든지 너에게 기쁘게 잘라 줄게 돌이 하나하나 모여서 만리장성을 쌓듯, 만리장성을 쌓아서 나라를 지켰듯이 애미들의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가닥가닥 모여서 발달장애인 삶이 바뀌리라 믿는다.”며 눈물로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매번 장애인, 장애인 가족들은 이런 극한 투쟁을 해야만 하는가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출근투쟁을 두고 설전을 벌인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전장연의 투쟁방식을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비문명적’인 것이라고 폄훼하였다. 그는 전장연 박경석 대표와의 맞장토론에서 “당사자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장애인정책도 능력 있는 정책전문가가 더 잘한다는 류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준석이 놓치고 있는 팩트가 있다. 이른바 정책전문가들이 만들었을 것 같은 대한민국의 주요 장애인복지제도는 사실 전문가나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도 ‘장애인특수교육법’도 ‘장애인활동지원법’도, ‘발달장애인지원법’도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 당사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법이고 제도이다. 대부분 이준석 대표가 비문명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불법적인 투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정치는 장애인들의 투쟁방식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투쟁하지 않고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을 문제 삼았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문명국가란 약육강식의 정글처럼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 궁리를 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학과 합리, 논리와 정치적 이념을 앞세우기 전에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가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어떠한 국가, 체제, 정당도 결국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것은 철저히 인간의 얼굴을 할 때 만 문명국가의 정치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는 사회를 문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오징어게임에서 약자는 탈락하고 승자가 모든 상금을 독식하는 야만적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사회가 애써 외면해온 ‘장애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을 같은 인간다움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야 말로 문명국가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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