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TV만큼이나 어색한 장애인 없는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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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TV만큼이나 어색한 장애인 없는 TV
  • 편집부
  • 승인 2022.03.24 09:32
  • 수정 2022-03-24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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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해리/파라스타 엔터테인먼트 대표

세상엔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이다. 그런데 TV 속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이 남자라면 어떨까? 지금이라면 단번에 어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가까운 과거엔 그 모습이 당연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만 해도 여성은 사회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대신 연기했다. 이 때문에 생긴 우스운 상황도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는 ‘포셔’라는 여성 캐릭터가 남자 재판관으로 변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을 위해 당시의 남자 배우는 여자로 변장하고 다시 남장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 또한 백인이 흑인을 대신 연기했던 것도 한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불과 400여 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 장애인들 입장에서 대중매체를 보면 이와 비슷하게 어색할 것이다. 비장애인만 나오는 TV, 라디오, 여기에 장애인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와 UN 산하 기구 등이 함께하는 글로벌 캠페인 위더(Wethe)15에서는 전세계의 15%가 장애인이라고 알리고 있다. 무려 15%이다. 그러나 TV나 소셜미디어에 그만큼의 비중으로 장애인을 발견할 수 있는가? 1.5%는커녕 0.15%도 되지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 영국에서는 장애인 인구를 전체의 22%로 보고 있다. 그러나 2016년 로이드 뱅크 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광고에서 장애인의 비중은 0.06%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국내 영화 산업 발전을 위해 한국영화를 일정 비중 이상 영화관에서 상영하도록 ‘스크린 쿼터제’를 도입했듯, 장애인에 대한 미디어 비중 개선을 위해 ‘장애인 미디어 쿼터제’라도 도입해야 할 판이다.

장애인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빈도수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장애인이 어떻게 그려지는 지도 중요하다. 필자는 현재 장애인 전문 엔터테인먼트를 운영 중인데, 소속 아티스트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들이 기피하는 TV 프로그램이 꼭 있다. “다큐멘터리 프로엔 출연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소위 너무나 ‘짠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멋진 외모와 훌륭한 커리어를 가진 빛이 나는 분들이 섭외된 건데, 막상 이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어두운 집 내부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무엇을 담고자 하는 것인가? 국내 250만 명의 등록장애인 중에는 부유한 사람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시종일관 가난하고 아픈 사람이 등장하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분들의 뇌리에 박힌 대표적인 장애인 영화는 ‘오아시스’와 ‘말아톤’이다. 각각 장애인의 사랑과 꿈을 그렸지만 분위기가 애잔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최신 개봉작 ‘그것만이 내 세상’, ‘나의 특별한 형제’ 등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비중 있는 역할로 발달장애인 문상태 역이 나온다. 하지만 이 또한 주인공 김수현의 ‘형을 끝까지 보살피는’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나올 뿐이다. 장애인 캐릭터는 이렇게 잔잔하고 슬프게만 그려져야 하는 것일까?

스릴러로 나올 수도 있고, 액션, 코미디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은 해외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검증되었다. 2020년 작 ‘런’엔 휠체어 장애인 주인공이 나오고 2016년엔 ‘맨 인 더 다크’ 영화가 개봉됐는데 둘 다 장르는 오싹한 스릴러다. 액션 영화도 있다. 2017년 작 ‘어쩌다 암살클럽’은 장애인 세 명이 암살단으로 나오는데, 아무도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용의자로 의심하지 않는다. 이 모종의 사회적 편견을 역이용하고, 수사의 허점을 노려 그들은 끊임없이 암살임무를 수행한다. 암살이라는 소재는 무섭지만 적어도 장애인은 짠한 존재로부터 거리가 몹시 멀다. 해외 영화시장에서 장애인 관련해 드라마 장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80, 90년대의 ‘레인맨’과 ‘포레스트 검프’가 거의 마지막이다.

누가 장애인 배역을 연기하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국내 영화와 드라마에선 내로라하는 국민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문소리, 조승우, 신하균, 진구, 이광수 등 배우들이 깜짝 놀랄 만한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장애인이 연기하는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휠체어 장애인들은 휠체어 탄 TV 속 인물의 다리를 보며 비장애인인지 장애인인지를 한눈에 눈치챈다. 다리 모양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시청자 입장에서 조승우를 보며 이 사람이 실제 장애인이라고 몰입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조승우는 조승우이다.

열악한 촬영 환경의 여건상 장애인 연기자보다 비장애인 연기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일면 타당하다. 아직 우리의 영상 제작 환경이 완벽하게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장애인 캐스팅이 생활 속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최신 마블 개봉작 ‘이터널’에서 청각장애인 마카리 캐릭터를 심었다. 이 역할은 실제 청각장애인인 로렌 리들로프가 연기했다. ‘왕좌의 게임’에서 사랑받는 티리온 라니스터 캐릭터는 132cm의 피터 딘클리지가 CG 없이 연기했다. 또한 넷플릭스 세계 2위 콘텐츠,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에는 삼각관계를 주도하며 여자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애인 빌런이 등장한다. 사지마비가 있는 배우 조지 로빈슨은 덕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미디어 콘텐츠가 곧 대중의 장애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방에 널린 대중매체를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똑똑하며, 용기 있는 장애인 캐릭터를 보고 자란 사람들은 장애인을 어떻게 인식할까? 무엇보다 그런 캐릭터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장애 인식의 수준이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훌륭하게 연기를 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장애인 연기자가 실존하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 정부는 장애인들의 사회화를 돕기 위해 기업마다 장애인의무고용제를 도입하기도 하고 장애 인식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인식 개선 강사들을 육성해 이들을 기관마다 파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정답은 더 쉬운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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