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우열의 차별 환상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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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우열의 차별 환상에서 벗어나야 
  • 편집부
  • 승인 2021.02.02 13:09
  • 수정 2021-02-02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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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식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전남직업능력개발원장

 

인간의 다름의 다양성은 우열이 아닌  상호존재의 존중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물음의 태동은 사물을 구별하는  인지에서 시작되었고, 이 인지는 思考(사고)로 이어져 자아라는 존재인식으로 이어졌다. 특히 인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주체와 객체, 객체와 주체 간에 “다름”의 자각에서 진화하기 시작했으며, 다름의 자각은 인류에게 경이롭고, 신비스럽고, 축복받은 인류 진화의 마치 빅뱅과도 같다. 다름의 자각은 다름 말로 표현하면 “다양성(diversity)”이다.

다양성은 인간을 보다 더 이성적인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명존중의 근원이다. 

다름(difference)은 곧 다양성이고, 그것은 사고를 통한 끊없는 연쇄반응의 인식으로 진화로 이어지게 한 결정적인 자연의 커다란 충복의 선물이다. 이 다름이라는 다양성은  인류의 축복과 행운이 아닌가 싶다. 그것의 탄생이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간에 이로 인하여 마침내 인류는 다른 종에서 벗어나 이성을 통한 문명 진보의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다름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대 자연 속에서 인간도 역시 자연의 하나의 부속물로 단지 하나의 개체로만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고, 다름의 다양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애당초부터 자연의 다양한 종과의 적자생존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다름이라는 다양성 자각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함께 존재”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 상호 함께 의존”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고리가 단절되면 공존하면서 생존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 유명한 로빈슨 크로스 일화도 사실은 무인도에서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곁에는 하인이 있었다.

함께 존재하고, 함께 의존한다는 것은 무언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무언인가 서로서로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무엇인가 혼자의 두려움과 고독이 나누는 함께할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인류에게 있어 전대미문의 인간존재의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다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인권을 바탕으로 한 인간존중은 바로 이 다름의 다양성이 없었다면 결코 성취할 수가 없다. 

다름의 다양성에는 상호 존재(interbeing)한다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존재는 서로 다름이 있기에 물음이 가능하고, 또 주체와 객체, 객체와 주체 상호간을 인식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다름은 인간존재의 주체를 드러나게 해준다. 결국 주체와 객체는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는 상호보완, 상호의존의 숙명인 것이다. 

나만이 존재하고 다른 존재가 없다면 결국 자기 존재는 인식할 수가 없다. 관찰자인 자아와 피 관찰자인 타아로부터 모두가 독립해서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고, 또 여기에 지금 있는 것은 다름의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별 많큼 각기 다른 존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온갖 짐승, 산, 강, 돌, 먼지, 구름, 비, 바람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  상호의존과 상호존재의 전제는 타자의 다름이라는 다양성에서 온다. 내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또 타인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은 나와 다른 다름을 인식했다는 것이고, 그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인간의 끝임 없는 물음을 해답을 찾기 위해 수천 년을 해매면서 다름의 다양성이란 인류에게 있어 전 역사를 통해 다시는 받지 못할 축복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서의 사과나무와 버금가는 제2의 원죄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다.

다름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상호의존과 상호존재로의 정체성(identity)이 비교와 우열로 획일성(uniformity)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이것은 곧바로 서로간의 다름의 다양성 존중이라는 존재론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오르지 비교와 우열의 대상자로 생각하는 마치 치열한 차별의 우위 경쟁으로 인간 스스로가 또 다시 원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도 문명의 진보라는 명문 하에 인간성을 포기하는 다시금 자연의 부속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

다름과 비교는 본질적으로 개념이 다르다. 다름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나, 비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다양한 객체의 무시 그리고 획일성만을 존재이유로 하는 인간성 상실의 위험성이 있다.이것은 또다시 핵반응처럼 연쇄반응을 일으키는데 나와 다른 자에 대한 차별과 무시로 이어졌다.

문명은 야만으로, 정체성을 획일성으로, 다름을 차별로 모든 것이 비교를 통한 우월성으로 인간존재가 역행하여 퇴보하고 있는듯하다.인간에게 지혜가 시작된 시기에 그 지혜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지혜의 개념마저도 이제는 지식으로 바뀌고, 인간은 기억을 저장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오늘날 인간사회의 모든 면면에서 지나친 비교가치 지향으로 인한 정체성의 상실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않고,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함께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만큼 더욱 상호존재의 인간성 존중은 더욱 소외되어 가고 있다. 

오랜 세월 끊임없는 의문의 사고를 통해 인식된 생명의 다양성이란 소중한 선물을 지키고 그리고 소중한 선물을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해야한다. 인류의 역사에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양성이다.

진보의 문명이 가속페달을 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시금 이런 인간존재에 대한 함께 있는 존재, 함께 의지하는 존재, 함께 고독을 나누는 존재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듯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유하든, 가난하든, 늙든, 젊든, 지식이 풍부하든, 지식이 부하든, 잘살든, 못살든, 심신이 불편하든, 신심이 건강하든, 좋은 직장에 다니, 실업상태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권력이 있든, 권력이 없든 간에, 장애가 있든, 장애가 없든 간에 이 모든 차별과 비교를 극복하고 이런 모든 존재가 있어 서로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한다면 오늘의 우리사회는 미래를 희망할 수가 있다. 주변의 모든 존재 심지어는 먼지나, 지렁이나, 숱한 잡초까지도 그것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우월도 없고, 부족함도 결코 없다. 단지 다름의 다양성의 경외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인간존재라면 모두에게 그 어떤 차이가 없으며, 차별 또한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 존재는 탄생과 시작하여 지금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함께 해야 하는 상호의존의 운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우열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세상에는 또한 평균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 인간은 다차원적이다.
“평균의 종말(토드로즈 저작) 책에 나오는 미국여성의 평균적 신체수치를 바탕으로 만든 조각상인 “노르마”에 일치한 여성을 뽑는 대회를 열었으나 그 노르마상에 일치한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지문과 같이 같은 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무한한 다양성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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