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정책에서 보편주의란?
상태바
복지정책에서 보편주의란?
  • 오건호/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 승인 2020.10.23 09:19
  • 수정 2020-10-23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현금소득이 있어야 한다. 의료, 요양, 교육, 주거 등과 같은 서비스도 필요하다. 그런데 시장경쟁체제에서 개인 스스로 모든 ‘필요(needs)’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이에 사회가 부족분을 지원하는 게 바로 복지이다. 일부 나라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별로 모든 필요를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 복지국가 문패를 달기도 했다.

인류 역사에서 사회가 지원하는 ‘필요’의 범위는 계속 늘어왔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절대빈곤에 처한 사람들만 지원했으나, 이후 대상이 확대되고 마침내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삼는 보편적 복지까지 등장했다. 복지가 시민의 권리로서 자리잡은 ‘복지국가’가 인류사회에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지국가 담론이 부상했다. 2010년 무상급식 논란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복지 논의가 개별 제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보편복지/선별복지라는 복지 ‘설계원리’를 다루었고,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여야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렇게 지난 10년 보편적 복지 바람이 불고 실제 복지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운 사람을 위한 복지는 부족하다. 실제 대다수 계층을 포괄하는 복지(무상급식,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는 상당히 늘었으나 기초생활보장, 장애인복지에서 보듯이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을 위한 복지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복지지출의 2/3를 차지하는 사회보험 부문에서도 불안정 취업자들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정작 사회보험이 필요한 사람들이 제도 밖에 배제되어 있다.

요약하면 ‘복지의 불균등 발전’이다. 정작 어려운 사람을 위한 복지는 제자리에 머물고, 중간계층 이상을 포괄하는 보편복지는 빠르게 증가했다. 서구 복지국가 이론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는 보편복지가 발전할수록 재분배가 증진해 하위계층도 실질 혜택을 얻는다고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는 복지정치의 세력화, 복지재정의 확충 등 여러 주제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 보편적 복지 담론의 현주소도 점검하기를 제안한다. 현재 우리가 지닌 보편주의에 대한 인식을 재검토하자는 취지이다.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 담론은 무상급식 논란을 계기로 형성되었다. 당시 급식을 모든 아이에게 제공할까, 아니면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만 제공할까가 논점이었다. 이어진 무상보육,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에서도 동일한 논쟁이 뒤따랐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에게 지급하면 보편, 일부에게만 제공하면 선별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단일 제도 수준에서 대상 범위를 기준으로 보편 여부를 따진 것이다.

하지만 복지국가 원리에서 보편주의는 개별 제도 수준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보편주의의 핵심 원칙은 포괄성과 급여 적정성이다. 해당 복지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급여도 일정 수준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때 포괄성과 급여 적절성은 하나의 제도로만 구현되는 건 아니다. 복지정책에서 사회가 지원하는 필요의 범위가 넓어져 왔다. 예를 들어,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연금은 얼마 전까지 국민연금만 존재했으나 퇴직연금이 도입되고 기초연금도 시행되었다. 이제 세 가지 법정 연금이 중층적으로 적용되는 제도의 망으로 노후소득보장에서 포괄성과 급여 적정성을 구현한다. 여기서 상위 30% 노인은 기초연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을 통해 더 많은 급여를 보장받는다. 기초연금만 보면 배제되지만 전체 연금제도로 접근하면 노후소득보장망에 포괄되고 급여 적정성은 오히려 높은 수준이다. 반면 가난한 노인은 기초연금 대상이지만 전체 노후소득보장에선 빈곤 상태에 계속 머문다.

현재 대한민국은 서구 복지국가가 시행하는 거의 모든 제도를 도입했다. 아파서 일하지 못했을 때 생활비를 지원하는 상병수당제도만 아직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지닌 ‘필요’를 지원하는 방식도 개별 정책을 넘어 제도의 망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러면 현재 불균등 발전을 개선하는 방향도 분명해진다. 모든 계층, 집단의 복지가 골고루 발전하기 위해 지금 절실한 건 취약계층,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복지이다. 우리가 보통 ‘선별복지’라고 부르는 제도들이다. 한국에서 복지의 보편주의를 강화하려면 역설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선별복지’ 확대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제도의 망을 통해 모든 계층에게 포괄성과 급여 적정성을 구현할 수 있다. 보편주의를 개별 제도를 넘어 제도의 망 수준으로 인식을 넓히자. 보편주의를 옹호한다면 더욱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에 힘을 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