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수어방송이 공영방송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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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수어방송이 공영방송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
  • 김동찬 사무처장/언론개혁시민연대
  • 승인 2020.06.19 09:22
  • 수정 2020-06-19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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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KBS, MBC, SBS 지상파방송 3사에게 “농인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메인뉴스를 시청할 수 있도록 한국수어통역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방송 3사가 메인뉴스에서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라는 게 인권위의 판단이다. 권고문을 받은 방송사들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와 협의에 들어갔다.

그간 방송사들은 다른 시간대 뉴스에서 수어통역을 제공하면서도 메인뉴스(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에서는 서비스를 외면했다. 이번 인권위 조사과정에서도 방송사들은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TV화면이라는 공간의 제약성, ∆청인 시청권과의 조화, ∆메인뉴스 외 프로그램에서 수어제공, ∆스마트 수어 방송서비스를 통한 중장기적 개선을 해법으로 주장했다. 요약하면 현재의 기술 여건에서는 수어통역을 포함한 화면구성을 하기 어려우며,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수어통역 화면을 분리할 수 있는 스마트 기술이 상용화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이다. 주무 기관인 방통위 역시 스마트 수어 서비스를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스마트 수어 방송서비스’나 ‘별도의 수어통역 기능을 갖춘 TV 수상기의 개발과 보급’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특히 공영방송의 선택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편성’이라는 공영방송의 가치 때문이다. TV 외에도 다양한 기기로 영상콘텐츠를 소비하는 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서 과연 미래에도 공영방송이 중요한 가치를 가질지 의문시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TV나 라디오 수신기를 이용하지 않는데도 왜 수신료(시청료)를 납부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편성’을 답으로 내세운다. 보편성이란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이용 가능한 서비스’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공영방송은 인터넷과 같이 방송이 아닌 플랫폼에서도 쉽게 이용 가능하도록 서비스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또한 보편성이란 ‘성별, 인종, 장애 여부에 관계 없이 모든 수신료 부담자에게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래지향적인 수어 서비스의 방향은 자명하다. 방송기술이나 수신기가 개발될 때까지 농인을 위한 서비스(=농인들의 권리)를 유보하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전달하는 방식/창구를 확장하여 지금 당장 가능한 공간(예컨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부터 수어 서비스(=농인들의 권리)를 실시(=보장)하여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수어통역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 발달이 아니라 공영방송 서비스의 혁신과 진화이다.

둘째, 사회 내 ‘다양성’의 반영 때문이다. KBS가 늘 모범 모델로 내세우는 BBC는 영국 사회의 문화적 다원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성과 포용전략’(Diversity and Inclusion Strategy)을 수립해 시행 중이다. 전략안에서 BBC는 출연진과 전체 인력 구성에서 흑인, 아시아인 등 소수인종 출신 비율을 15%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또한 제작 가이드라인을 통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여성, 장애인과 소수인종이 균등하게 등장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소수계층이나 사회약자의 삶과 문화를 일상적으로 노출하여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공식 공용어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수는 수어를 농인들의 표현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 공영방송은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스마트 기술을 이용해 농인과 청인의 시청화면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메인뉴스에서 한국수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농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이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임무이다.

끝으로 농인들의 요구를 대하는 공영방송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해외의 공영방송들은 존재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저마다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시청자와 새로운 관계 맺기다. 과거 권위주의적 태도와 불평등한 관계로는 사회적 신뢰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시청자 관계를 보다 대화적이고, 협력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공영방송은 여전히 장애인에게 높은 벽을 세운 채 농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농인단체가 공영방송과 벌이는 싸움은 단지 농인만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영방송을 책임 있는 방송으로, 시민이 주인 되는 방송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이다. 공영방송은 농인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지금 농인들은 공영방송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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