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그 자체를 인정하는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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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그 자체를 인정하는 사회를 꿈꾼다
  • 김철환 활동가/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 승인 2020.05.25 09:27
  • 수정 2020-05-25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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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인권선언)은 현대 인권에 기초를 만든 문서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이 인권선언을 ‘인권의 바이블(bible)’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인권선언 본문은 천부 인권으로 시작한다. 인권의 동등성의 내용도 앞에 배치해 강조하고 있다. 선언 제1조에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존엄과 권리의 동등’이다. 동등은 평등에 기초를 두는데, 평등한 인간의 존엄과 권리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인권선언 제2조에 명시한 ‘차별의 금지’의 내용도 동등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인권선언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는 안 했지만, 차별금지에는 개인이 가지는 욕구 등을 억압하지 않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욕구만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을 표출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까지 말이다.

장애인의 경우를 보자. 장애인이 장애인으로 살 권리, 이것도 자신의 특성을 표출할 권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으로 살지 그럼 무엇으로 살아요?” 이런 반론도 나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차별의 존재로서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상태 그 자체를 인정받고,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삶, 다양성 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온전히 장애인으로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좀 더 좁혀 농인(Deaf)들의 경우는 어떨까. 관련 사례가 있다. 얼마 전 현재 KT(케이티)가 ‘마음을 담다’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다. 이 캠페인은 농인의 가족(부모, 형제자매, 자녀 등)이나 친인척의 목소리를 합성하여 농인의 수어를 음성으로 변환하여 들려주는 이벤트이다. 이것만이 아닌 목소리를 원하는 희망자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벤트를 다양성의 관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농인이 수어나 음성 중 골라 쓸 수 있도록 이벤트를 한 것이라고 말이다. 혹자는 기술을 장애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기술로 장애를 없애면 좋은 것 아니냐는 논리이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러한 논리에는 ‘장애에 대한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

장애인(장애)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장애의 동기가 개인에게 있으므로 장애로 인한 모든 문제는 개인이 져야 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시각인데, 사회적 관점이다. 사회의 관계나 체계에 의하여 위계가 생기고, 위계는 억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장애인임을 인지하게 되고, 불편이나 차별을 받는다는 관점이다.

다시 농인의 교육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개인적인 관점에 의하면 농인 교육의 목표는 ‘청인’과 닮도록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청각장애를 극복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청인처럼 행동하고, 청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교육하게 한다. 언어훈련이 강조되고 수어(手語)는 쓰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는 다르다. ‘농’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농인의 신체적 기능을 바꾸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다. 농인의 욕구에 따라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완전한 인격체로서 성장하도록 한다. 농인의 경우 청각보다 시각적 감각이 앞서므로 수어교육이 권장된다. 그리고 농문화를 인정하고 전수하려는 노력들도 이루어진다. 농학교에서 농인교사의 채용을 늘리고, 농인교사와 농학생의 접촉을 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려 한다.

개인적인 관점이나 사회적 관점,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농인의 특성에 따라, 선호하는 소통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 대부분의 복지선진국은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권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

여전히 수어를 사용하면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음성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농인과 수어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만들어 왔다. 이러다 보니 농아동의 부모들은 기를 쓰고 농자녀들에게 음성언어를 가르치려 한다. 인공와우 등 보조기기에 의하여 장애를 ‘탈출’하려 한다.

당연히 수어는 찬밥이다. 국립국어원(2008)의 조사를 보면 농인 중 3%만이 부모를 통하여 수어를 배웠다고 한다. 최근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인권위원회(2019)의 자료에서는 농인 중 유아기와 아동기에 수어를 배운 비율이 26.5%라 한다. 일반 아동이 대부분 가정에서 언어를 습득하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농인들에게 선택권이 많지 않은 것이다. 가족 간에 수어 쓰기를 꺼리고, 깊이 있는 대화도 어렵다. 소통이 잘 안 되어 겉도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족들은 농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네 목소리를 듣고 싶다.”라는 바람이 생긴다. 소통이 원활히 되고 자유로운 교감이 되었더라면 그런 욕구는 많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장애인복지는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 제공에 머문다면 온전한 복지라고 말하기 어렵다.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동등’이 정부 정책에 스며들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 장애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수준까지 와야 한다. 농인의 경우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청인처럼 만들려는 시도들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러한 반인권적인 행위들이 멎을 때 장애인복지도 탄탄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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