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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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의 정치학
  • 한상희/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20.03.20 10:18
  • 수정 2020-03-20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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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끝난 ‘낭만닥터 김사부 2’는 장기기증에서부터 존엄사에 이르기까지 삶과 죽음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첨예한 문제지점들을 다루었다. 병원에 난무하는 ‘정치질’에 맞대어,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라는 김사부의 메시지는 최고시청률 28.4%를 담보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다. 그 울림에도, TV 앞의 모든 시청자들이 그러하듯 의료화의 통치술 앞에서 줄곧 소외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 내팽개쳐진다. ‘스스로 살고 스스로 치유하는 시민의 힘’은 드라마에서는 ‘전문가에 의한 치료라고 하는 더욱 현저한 사회적 특권’(I. 일리치)에 의해 대체된다. 드라마 제15회분은 이를 단적으로 말한다. 재벌의 아들이 수술 중에 숨지는(이를 전문용어로 ‘테이블 데쓰’라 부르나 보다.) 일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병원의 정치질에 관해서만 사건성을 가진다. 한 사람의 삶이 스러져갔지만, 드라마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한다. 죽음은 방치되고,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일련의 절차는 공적 의제가 되어 모든 출연자들의 동선을 지배하는 테제를 이룬다. 환자는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며 죽음까지도 수용하였음에도, 의사들의 관심은 “왜 (환자가) 죽게 내버려 두었느냐”가 아니라 “왜 (의사가) 살리지 못했느냐”에 집중된다. 병원이라는 공식 제도 앞에서, 죽음과 싸우는 주체는 환자가 아니라 의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중략)

코로나 사태의 초기에 가장 빈번히 등장했던 것은 불결한 재래시장의 박쥐라는 이미지였다. 이 문명의 시대에 야생과 야만이라는 비위생적인 것의 존재는 의당 척결되어야 하는 것이 돼 우한지역에서 확산되는 그 질병의 위험이 오로지 그들의 것으로만 고착되게끔 한다. 곧이어 등장한 중국인 밀집지역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들은 이런 허위의식을 강화한다. ‘위생불량 심각’ ‘비위생적으로 판매하는 음식’ ‘가래침을 길바닥에 뱉는 경우’ ‘중국인 또는 화교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비율이 극히 낮았다’ 등등의 기사들은 크루즈선의 입항을 거부한 일본의 (깔끔한) 방역조치와 대비되는 전근대성의 목록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 봉쇄’라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되며 신천지라는 종교단체의 ‘이단성’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이 이어질 수 있게 된다.

코로나 확진자에 가해지는 우리의 부정적 시선은 이렇게 생산되고 또 강화된다. 우리들에게는 감염병인 것이 그들에게는 전염병으로 규정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들의 기침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에 우리가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낙인찍고 또 통제하여야 한다. 그들은 전염시키는 사람들이기에 감염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우리들과는 다른 취급이 허용된다. 우리들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사생활의 비밀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당해야 하며, 사회의 보건과 위생을 위하여 그들은 ‘신앙의 자유, 신앙을 고백하지 아니할 자유’조차도 내던져야 한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기에 그들은 우리들이 누리는 일상의 생활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동선’이라는 명분으로 재난문자에 실어 온 누리에 낱낱이 공개하며, 그 확진자 번호에 ‘신천지’라는 낙인을 다시 한 번 부가한다.

대저 집단적 공포는 혐오를 야기한다. 문제는 그 혐오의 효과가 혐오대상자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데 멈추지 않음에 있다. 그것은 오히려 혐오하는 자 집단을 내부적으로 쇄신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박쥐라는 야만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문명성, 중국인의 험한 삶에 대비되는 우리들의 보건위생, 그리고 신천지의 비밀성과 구분되는 우리들의 정상성 등으로 이어지는 내부적 규율과 통제를 강화하고 또 재생산한다. 전염가능자-주로 예배에 참석한 신천지교인들-을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한 종교단체의 신도명부는 빠짐없이 공개되어야 하며, 이미 사라졌어야 할 정보경찰이 전면에 나서 이들의 개인정보와 위치정보를 수집·분석하도록 방치하며, 종국에는 신천지라는 공동의 적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것, 사적인 것, 심지어 인권조차도 초개와 같이 포기할 수 있는 새로운 국민상이 요구된다. 방역이라는 행정권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형사사법권인 강제수사권을 동원하라는 일각의 요청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검찰파쇼를 비판하던 바로 그 목소리들이 은연중에 검찰파쇼적 사고를 내면화하고 또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공포 위에 군림하는 전문가집단이다. 감염과 치유, 검역과 예방, 심지어 질병의 고통에 대한 공포조차도 우리의 작품(works)이 아니라 전문가집단의 진단(diagnoses)에 기반한다. 의료와 행정과 치안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감염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어 양자의 경계를 설정한다. 그들은 매일같이 감염 여하에 대한 통계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감염의 경로를 고발하며 감염 가능한 공간을 구획한다. 마스크에서부터 기침하는 방법까지 감염되지 아니한 사람의 일상적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은 그들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집회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하는 것 또한 그들이다. 의당, ‘공간을 분할하고, 개인들을 가시권 안에 두며, 행동을 규격화하는 등’의 경찰통제(M. 푸코)는 그들이 독점하는 전문지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도시적 공간배치’에 기반한 사회의 규율적·조절적 메커니즘은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이라는 외관을 가지지만 그 실질에는 전문가 지배의 현실이 자리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보편성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의료와 행정의 전문지식을 독점하는 전문가집단이 구사하는 특수성의 정치에 함몰되어 있다. 공개의 투명성을 자랑하는 현재의 질병관리 체제가 정작 그 공개성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사회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글은 감염병이 급속히 확산되는 이 위난의 시기에 생명정치 운운하면서 가뜩이나 바쁜 국가적 위생체제를 흠잡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들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고자 하였던 헌법 전문의 규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혹여 그 안전이 국가나 체제의 안전으로 흘러가 테러방지법이나 만드는 빌미가 되어 버릴까 자기검열에 빠져드는 노파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외침이 아니라, 그 사회가 진정으로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바이러스는 독립한 재생산 능력을 갖지 못하고 숙주의 복제시스템에 빌붙어 자신을 복제한다. 그래서 그것은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오가는 일종의 반(半)생물이다. 생명의 저 너머에서 낭만닥터를 우롱하던 정치질이 전문화·관료화된 의료체제에 기생하여 자기복제를 반복하듯, 생명권력이 자기 종족과 적대적인 종족을 구분하고 그들 간의 대립에 기생하여 스스로의 권력을 확대 재생산해 내듯 말이다. 그리고 목하 우리들이 진정으로. 퇴치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 바이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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