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웅 -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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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웅 -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
  • 편집부
  • 승인 2017.12.18 09:55
  • 수정 2017-12-18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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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한빛맹학교 수학교사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 중에는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을 알려주려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땅, 불 바람, 물, 마음을 외치던 초능력 전사들은 다섯 가지 힘을 모아야만 캡틴 플래닛이 될 수 있었고 위기는 비로소 그 상태에서 해결이 되곤 했다.
 후레쉬맨, 바이오맨, 독수리 5형제... 하던 5인조 시리즈의 내용도 한 두 명의 특출난 재주를 가진 주인공이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순간 조금은 약해보이는 맴버의 도움으로 공동체의 합체가 이루어지면서 문제가 풀려가고 적군을 무찌르는 내용들로 귀결되었던 듯하다.
 아주 어릴 적 본 개구리 왕눈이, 멍멍기사, 실버호크 같은 만화들도 그랬지만 어린이 소리 듣던 때의 피구왕 통기도 축구왕 슛돌이도 그랬고 비교적 많이 컸을 때 등장했던 포켓몬스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풀어내곤 하는 것 같다.
 작가들과 만화영화 편성 책임을 맡은 어떤 분의 의도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동생들과 친구들과 사이좋게 도와가며 지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을 심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던 듯하다.
 정확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 그 때 내게 영웅이고 우상이었던 주인공 캐릭터의 모습과 행동들은 따르고 닮아가야 할 진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게 처음으로 학년 계급장이 붙여진 초등학교 어느 때인가부터 내 믿음은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바뀌어 가고 있었다.
 국어를 잘 하는 녀석이 수학도 잘하고 수학을 잘하는 녀석은 체육도 음악도 잘했다. 그것들은 매월마다 보는 월말고사 점수로 냉정하게 서열화 되어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뉘어져 갔다.
 반장이 되는 것도 애국조회에서 대표로 상을 받는 것도 학교대표로 이런저런 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늘 칭찬 받던 녀석들 몇몇이면 충분했다.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오르면서 전공을 정하고 특출난 특기를 가진 몇몇이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작은 역할들을 부여받긴 했지만 여전히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은 극소수로 공동체를 대표했다.
 윤리책에 등장한 플라톤 할아버지는 '철인정치'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그들의 우월한 위치를 의미 있게 해주는 철학적 근거까지 제시해 주었다.
 그 때쯤의 독수리 5형제는 공동체적 의미보다는 다섯이라는 작은 숫자에 들어간 5%의 엘리트 영웅의 의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에 갔을 때도 학교라는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도 전체를 이끄는 것은 적은 수의 주도적 인간들이라는 생각은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공고해졌던 것 같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소수이고 그들만으로 전체가 움직여진다고 생각하고 믿었다.
 작은 공동체도 그랬지만 정치도 경제도 그렇게 보였다.
 지난달 우리 학교는 10년 만에 한 번씩 거쳐 가는 종합감사를 경험했다. 특별히 잘못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동안의 업무들을 서류로 증명하고 준비해 가는 일은 절대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장해 놓은 파일들을 찾아내고 새롭게 정렬하고 프린트해 가면서 쌓여지는 모습들은 힘들기도 했지만 그간의 내 수고로움이 증명되는 느낌에 뿌듯하기도 했다. 감사라는 것이 즐거울 리는 없지만 특별한 이상 없는 대장들과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나만은 우리 부서만큼은 청렴하게 열심히 일했다는 확인 작업이 되어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적어도 준비가 시작된 며칠 동안은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날짜가 흐르고 각자 맡았던 업무들을 서류더미로 만들고 제출하는 시간! 난 뭔가 당연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부끄러운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바쁜 만큼 바쁘지 않은 교사는 없었다. 내가 내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동안 다른 교사들은 각자의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각자 맡은 업무를 각자의 방법대로 충실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쌓여지는 서류는 그동안 각자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냐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책상의 상판을 휘어져서 못 쓰게 만들 정도가 되어갔다.
 두 달도 넘는 동안의 밤샘 작업으로 우리 학교는 특별한 지적사항 없이 무사히 감사를 마쳤다.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모두 열심히 일한 예상된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두 열심히 착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다만 나처럼 착각하고 시끄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에도 앞장서고 대표하는 것이 좋았던 친구가 있었고 튀지 않고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뿐이었다. 독수리 5형제는 앞장서서 싸우는 영웅이긴 했지만 정의가 옳다고 느끼는 만화 속에 그려지지 않은 대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아무 의미 없는 다섯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요즘 또 새로운 영화에서 어린 시절 영웅들이 손을 잡고 뭉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슈퍼맨도 원더우먼도 여전히 우리의 위기를 해결해 주는 영웅의 역할을 감당해주는 듯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캡틴 플래닛은 우리의 힘이 모여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양과 크기가 다를 뿐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고 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영웅들이 진정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차분하게 느끼고 그들의 의미를 따르는 것이다. 큰소리로 앞장서는 영웅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쉽지만 조용히 함께 하는 또 다른 영웅을 느끼는 것은 특별한 집중과 성찰 없이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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