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 입원중인 예준이와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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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째 입원중인 예준이와 가족 이야기
  • 오혜영 기자
  • 승인 2017.08.25 10:09
  • 수정 2017-08-25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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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일 6살 예준이의 모든 게 멈췄다
 
 
 
자식에게 조그마한 생채기가 나도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어떨까. 하지만 예준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에 이어 병원에서의 2차 사고로 결국 뇌병변 1급 판정을 받았다. 거금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그마저 사기였다. 비극 같은 7년을 흘려보낸 예준이 사연을 들어보기 위해 새올재활요양병원을 찾아 예준이 어머니와 얘기를 나눠보았다. 
 
2011년 6월 1일 6살 예준이의 모든 게 멈췄다
교통사고 후 2일만에 깨어났지만 의료사고로 아무것도 못 알아봐
 
1차·2차사고로 무너져 내린 예준이 가족
 예준이는 사고 전 말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던 건강한 6살 아이였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교통사고가 6월 1일 부모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일어났다. 예준이가 집 앞 횡단보도를 외할머니, 누나와 함께 초록불에 건너고 있었는데, 우회전하던 트럭이 예준이를 치어서 두개골이 골절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연락을 받은 후 인천성모병원으로 급하게 달려갔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이 들려왔다. 
 치료 끝에 중환자실에 있던 예준이는 2일 만에 깨어났고 엄마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걷지도 못하고 음식물을 삼킬 수도 없었지만 그때는 분명히 인지를 할 수 있는 아이였고 색칠공부도 하고 말도 할 수 있었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분들이 그 증인이다. 며칠 후 예준이 췌장에 물이 좀 고였는데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얘기를 듣고 7월 12일 강남으로 갔다. 원래 물주머니를 꽂고 있었다. 그런데 7월 30일 담당 교수가 자리를 비우고 다른 의사가 빨대처럼 생긴 목관을 제안해왔다. 의료 쪽 지식은 없지만 왠지 딱 봤을 때 끼우고 싶지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안을 해왔고 결국 교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후 예준이는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병실로 갔다. 레지던트에게 중환자실에 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지만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일반병실에서 깨어난 예준이는 계속 목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8시간 뒤에 쇼크가 온 예준이는 눈을 감았다. 예준이의 아버지는 예준이에게 눈을 감지 말라고 볼을 치기도 했다. 결국 중환자실로 향했고 심정지도 잠깐 왔었다. 그 후 중환자실에서 6개월, 일반병실에서 6개월. 1년 정도 서울에 있다가 인천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의료사고라 여기고 2012년 8월쯤에 재판을 위해 외삼촌으로부터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을 소개받았다. 외삼촌이 일을 잘하니 믿고 맡겨보라고 말해서 6천만 원이나 요구하던 돈도 그냥 줘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법적으로 무지하기도 했고 외삼촌이 소개해줬기 때문에 믿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사무장은 브로커였다. 변호사 선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충분한 증거를 근거로 배상을 요구하는 논리도 부족했으며, 재판장에 가족들도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재판은 1심, 2심 전부 패소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모든 게 잘못된 기분이었다.
 
뇌병변 장애1급 판정받아
 예준이는 지금 뇌에 산소공급이 안 돼서 거의 다 죽어 있는 상태다.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다. 앞도 보이지 않는다. 뇌병변 장애1급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나아진 점은 사실 없고 달라진 점이라면 나는 매일 봐서 잘 모르지만 어떤 분은 키가 좀 큰 거 같다고 말한다. 
 
가족은 집이 없어졌다
 나는 예준이와 함께 병실에서 생활하고 남편은 회사차에서 잔다. 딸은 처갓집에서 살고 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보니 웃음도 잘 나오지 않는다. 지금 가정상태는 차상위 계층으로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었다. 예준이가 한번 30분 운동하는데 4만원이다. 오전 오후 다 받으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남편이 혼자 일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 운동하고 나면 확실히 나아지는데 많이 못해주니 미안하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재판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알아보고는 있는데 혼자서 하려니까 힘들다. 나 혼자 알아보는 게 사실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포기를 해야 하나 싶어진다. 그러나 자식이다 보니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 불쌍하다. 지금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태다. 보험사는 재판이 끝났으니 알아서 갚으라고 말하고 병원은 나몰라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 있어도 넘어가는 편이었는데 자식일은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여기저기 이 사연을 내보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MBC에 한번 출연 후에 밀알복지재단에서도 연락이 왔다. 덕분에 기부를 받아 조금이나마 예준이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사건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도 크다. 1차 사고와 2차 사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재수사를 하고 싶지만 이걸 도와주는 곳은 없다. 다들 안타깝다고만 말한다. 
 
24시간 간호, 정말 쉽지 않다
 요즘 매일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증이 오기도 하지만 될 수 있으면 그런 생각 안 하고 밝게 살려고 한다. 속은 타들어가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39살인데 보통 이 나이의 엄마들은 애들 학교 보내고 카페 가서 얘기도 하고 일도 다닌다. 하지만 나는 매일 좁은 병실에서 혼자 예준이만 보는데 이게 정말 쉽지 않다. 매일 목에 삽입된 호스도 소독해주고 밥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욕창에 걸리면 안 되니까 통풍도 시켜준다. 그래도 병원에서 받아주는 것에 감사하다. 장기간 입원이라 병원 측에 이득이 안 될 텐데 벌써 6년 넘게 입원 중이다. 
 딸이 원래 엄청 밝은 아이였는데 예준이 사고 이후 말이 많이 없어졌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전화해서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하자 “엄마 아니야 괜찮아. 내가 더 미안해. 내가 예준이 손잡고 있었으면 되는데 미안해”라고 말해서 그날 엄청 울었다. 지금은 중학생이라 엄마 손이 많이 가야 하는데 못해주는 게 많아서 나중에 컸을 때 원망할까 봐 두렵다. 그래도 늘 술 먹지 말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착한 딸이다. 
 
멈추려 해도 눈물 나던 순간들  
 복지카드를 만들 때 동사무소에서 만들라고 연락이 왔는데 엄청 울었고 인정하기가 싫었다. 지금도 100% 인정은 못하겠다. 내 자식이 장애인이라는 것이 안 믿겼는데 복지카드 속에 아들이 웃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는 나아지면 등급이 낮아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예준이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언제는 예준이 같은 아이들이 지나가서 몇 살이냐고 물으니 예준이와 동갑이었다. 내 눈에는 또래 아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딸을 데리고 다른 가족들과 다 같이 여름휴가를 갔던 적이 있다. 또래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데 예준이 생각이 나서 슬퍼졌다. 다치기 전엔 아빠와 낚시하는 걸 좋아하고 체육도 1등만 도맡아 하던 건강한 아이였다. 특히 계란후라이를 좋아해서 사고 당일에도 우유랑 계란 한판 사오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린이 수첩도, 신발도 모든 게 6월 1일에 멈춰있다. 누나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책가방을 사주니까 예준이도 사달라고 조르기에 초등학교 가려면 2년이 남았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지금 같을 줄 알았으면 그때 다 사줄 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는데 일하느라 바쁘고 휴대폰도 기능이 좋지 않아 아이들 동영상이나 사진을 많이 못 찍어줬다. 옛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들을 수 없어 슬프다. 
 
더 이상 우리 아들 같은 일이 없었으면
 내 개인적인 꿈은 없다. 그저 예준이가 조금이라도 좋아져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장애아 부모들이 그렇듯 내가 예준이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없으면 돌봐줄 사람이 없어 찬밥 신세가 될까 봐 그게 두렵다. 딸은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까 건강했으면 좋겠다. 횡단보도 건널 때 자꾸 휴대폰을 보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랑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나도 억울하지만 나만큼 억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아들 같은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가진 건 없지만 뉴스를 보다가 아이들이 스쿨존 같은 곳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뉴스를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전화를 해서 돈을 보내게 된다. 그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일 같지가 않다. 세월호나 가습기사고 희생자들 같은 경우는 여러 명이기 때문에 힘이 있다. 그런데 나는 혼자 다니려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사건을 맡겼던 사무장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또 다른 사건이 있어 구속 중이며 대법원까지 소송이 끝났기에 이 사건을 어떻게 다시 처리할 수 있을지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 또한 쌓여만 가는 생활고와 무너져가는 가정형편에 예준이네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진 거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7년을 악몽처럼 보낸 예준이네 가족이 다시 희망을 얻을 수 있도록 이제는 사회가 도와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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