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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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가 아니더라도
  • 한고은 기자
  • 승인 2016.11.04 11:03
  • 수정 2016-11-04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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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출근 준비로 바빴던 얼마 전 아침이었다. 빳빳한 청바지를 입고 매무새를 고치려 엄지와 검지로 바지를 잡고 세게 잡아당기다가, 그만 바지를 놓쳤다. 잔뜩 힘을 주고 모으고 있던 엄지와 검지는 쏙 빠져나간 청바지 덕분에 부딪쳤고, 날카로웠던 검지 손톱이 엄지손가락을 세게 베어버렸다.

 소독하고 살을 대충 붙여놓고 밴드로 칭칭 감아 고정한 후 신문사로 출근을 했다. 대강 살을 붙여놓은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베어진 피부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한 그대로여야 했으며, 힘을 줄 수도 없었고 물을 묻힐 수도 없었다.   ‘엄지손가락 하나도 이렇게 불편한데, 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할까’라는 저급한 역지사지를 들이밀어 다분히 동정적인 발언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먼저 한 가지 고백하자면, 그게 동정적이고 저급한 어린아이 수준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사실 그러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즉, 기자는 재빨리 ‘그런 건 너무 수준이 낮지’라고 재인식하기 이전, 결국 수준 낮았던 셈이다. 
 중요한 건 역지사지가 아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본다면-’ 이라는 가정이나 상상씩이나 하면서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에 가상의 나를 대입해 실컷 감정이입한 뒤에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바뀌어야 합니다’라는 것이 과연 사회를 위한 정의인지에 대한 의문도 의문이거니와, 그건 나의 입장이나 나의 생각, 나의 신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건 ‘상식’이라는 태도가 중요하다. 
 상상 속에 내가 있지 않아도 그것은 바뀌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장애를 가져 불편하게 될 일을 상상하거나 간접경험하지 않더라도 장애인의 인권보호는 당연한 일이고, 복지예산 증액도 필요한 일이고, 이동권 확립을 위해 제도 마련은 상식이라는 거다. 내가 장애인이 되어보지 않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발언을 해서는 안 되는 거고, 굳이 그런 사람에게 ‘네가 그 입장이 되어봐(얼마나 비참하겠니).’라는 말로서 각성하게 할 필요도 없다는 거다. 가끔 비장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장애예방 교육이나 장애체험 등을 접하며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순간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역지사지도 중요하다. 감정을 움직이게 하니까. 감정의 힘은 크다. 그러나 크기만 클 뿐, 그래서 거대해보일 뿐, 실상은 다른 속성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공기와도 같다.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 인권 확립을 위해 필요한 건 값싼 역지사지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딘가에 버스를 탈 수 없어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있고, 이 사회에 수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현실자각과, 그게 비상식이라는 것에 대한 납득, 그리고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구체화된 행동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 내가 가여워하는 그 모든 것을 동정하고 마음 쓴다. 댓글을 달고 작게나마 기부하며 얕은 죄책감을 가볍게 던다.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그 허구 속의 나 자신을 가여워하다, 일순간 빠져나와 나의 신체적 안녕에 안도하고 부모님께 감사한다. 그러면 그날 내 몫의 일은 끝났다. 대다수가 그렇다. 그렇게 ‘한 케이스’가 지나간다. 그들이 기부금으로 좀 더 평온한 삶을 찾았다는 뉴스까지 따라온다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꼭 세상이 아름답게 바뀌는 것만 같다.
 글쎄. 그래봐야 바뀌는 건 없다. 고장 난 열차에서 가까스로 그가 몇몇 사람의 힘으로 빠져 나왔을 뿐이다. 열차 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있고, 고장 난 열차는 폭주하고 있다. 중요한 건 열차를 멈춰 고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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